1953년 7월 16일 25살 젊은 군인이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열하루가 지난 7월 27일, 1129일 동안 계속됐던 전쟁이 포성을 멈췄다. "아이고 이놈아! 며칠만 참지! 며칠만 더 견디지!" 아침저녁으로 냉수를 떠 놓고 막내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던 어머니는 가슴에 병이 생겨 이듬해 아들 곁으로 갔다.
6·25전쟁으로 한반도에서 400여만 명이 죽었다. 이 중 300여만 명은 1951년 7월 정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죽은 사람들이다. 정전협상이 2년을 끌면서 죽지 않아도 될 숱한 생목숨들이 전장에서 죽어 나갔다. 정전협상의 최대 쟁점은 포로 문제였다. 2만여 명에 달하는 중국군 포로 송환이 정전협상 장기화의 주요 요인이었다. 중국은 자국 포로의 전원 송환을 요구했고, 유엔군은 희망자 송환 방침을 고수했다. 중국의 강경한 요구는 협상의 결렬을 초래했고, 협상 결렬은 전쟁의 장기화로 이어졌다.
중국의 정전협상 막후에는 한 스파이가 있었다. 미 육군연락처(ALO) 소속 중국어 통역관 래리 친(Larry Wu-tai Chin, 金無怠)이었다. 래리 친은 포로 신문에 통역으로 참여하면서 중국군 포로들의 명단과 주소를 중국에 넘겼다. 포로들이 미군에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지, 누가 중국 송환을 거부하고 있는지 포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국에 보고했다.
중국은 래리 친의 정보를 토대로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중국 송환을 요구했다. 래리 친을 통해 미국의 협상전략까지 알고 있던 중국이 자연스럽게 협상 주도권을 잡게 되고, 협상은 지연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어느 역사학자는 래리 친의 스파이 활동이 ‘한국전쟁을 장기화시킨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래리 친은 1940년대 초반 그의 언어능력을 눈여겨본 중국 공산당 정보기관 중앙사회부(SAD)에 의해 스파이로 채용됐다. 중국의 방언과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SAD 지시로 1944년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관을 시작으로 홍콩 주재 미국영사관, 미 육군연락처(ALO)를 거쳐 1952년부터 CIA에 근무하게 된다. 래리 친은 언어 전문가로서 다양한 분야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래리 친은 ‘천생 스파이’였다. 1981년 CIA에서 퇴직할 때 미국과 중국 양국 모두 래리 친에게 공로 메달을 수여했다. 상부선인 위창셩(劉强生)의 망명으로 1985년 체포되기 전까지, 결혼 23년차 대만 출신 아내도 남편의 중국 스파이 행각을 알아채지 못했다. 중국은 ‘미국 내 반중 세력의 조작’이라며 래리 친의 존재를 부인했다. 래리 친은 재판이 끝나기 전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래리 친 사례는 중국 정보기관의 전략적 인내와 장기적 접근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보 목표에 접근 가능한 20살 전후 대학생을 영입해 순차적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CIA에 침투시켰다. 스파이 세계에서 러시아의 정보 활동은 폭풍(Storm)이나 허리케인(Hurricane)에, 중국은 기후 변화(Climate Change)에 비유된다. 러시아 첩보작전이 빠르고 강함을 추구한다면, 중국은 길고 느리지만 대상 지역이 광활하다. 지구 온난화처럼 점진적이고 장기적이며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다시 6·25전쟁으로 돌아가 보자. 래리 친의 스파이 활동으로 6·25전쟁이 장기화 됐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다. 전쟁 지속 기간은 다양한 요인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그러나 래리 친의 스파이 활동이 없었더라면 25살 젊은 청년이 적어도 1953년 7월 16일 전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