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정보요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 젊은 친구들이 필자에게 가끔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주저없이 답한다 ‘상상력’이라고. 상상력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남산의 선배들이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정보요원들은 제한된 시간, 한정된 자원으로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선 전통적이거나 습관적 사고 패턴은 문제를 망치거나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럴 땐 관점이나 접근 방식을 바꿔본다. 상대의 예측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결과도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 사고의 전환, 허를 찌르는 전략의 기본이 되는 게 바로 상상력이다.

정보학교에서 신임 교육을 받을 때였다. 교관 한 분이 클립 한 개로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내라고 했다. 제한 시간은 5분. 필자는 7~8개쯤 적어냈던 것 같은데, 기상천외한 답변들이 나왔다. 수갑 열기·자물쇠 따기·암살용 무기·과자봉지 밀봉·책갈피·가방 자물쇠·구멍 뚫기·지퍼 손잡이·끈·포크·열쇠고리·자살 도구·자해 도구·전기나 전자기기 합선·긁어서 흔적 남기기·이쑤시개·안테나·열쇠 복제·하트 펜던트 등등. 30여 년 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30개가 넘는 아이디어가 나왔던 것 같다. 조그만 클립 하나로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1990년대 초반, 관계부처가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을 두고 프랑스의 떼제베(TGV)와 독일의 이체(ICE)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프랑스와 독일에 나가 있는 정보요원들에게 떼제베와 이체의 장단점을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정보요원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2~3일도 안돼 장점은 차고 넘칠 정도로 수집됐다. 문제는 단점이었다. 현지 누구 하나 단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훗날 차장으로 퇴직하게 되는 독일의 염돈재 파견관이 아이디어를 냈다. 떼제베의 단점은 독일에서, 이체의 단점은 프랑스에서 수집하자고 제안했다. 3주가 지나도록 수집되지 않던 떼제베와 이체의 단점이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서 불과 3일 만에 수집됐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2023년 2월 어느 날 새벽, 한 국정원 직원이 민노총 사무실에서 압수해 온 외장하드 파일에서 영문자와 숫자로 된 ’1rntmfdltjakfdlfkehRnpdjdiqhqoek7‘를 우연히 발견했다. ‘혹시 그 파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국정원 직원은 조심스럽게 해당 문자열을 한글 자판으로 쳐 보았다. ’1구슬이서말이라도꿰어야보배다7‘이라는 우리말 속담이 나왔다. 이중 삼중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혐의자 파일의 패스워드였다. 그렇게 한 달 반 만에 어렵사리 풀린 혐의자의 파일에는 북한 지령문 90개가 숨겨져 있었다.

패스워드가 15자리를 넘으면 FBI도 현실적으로 풀기 어렵다고 간주하는데, 민노총에서 압수한 PC의 패스워드는 33자리였다. 현존하는 최고 슈퍼컴퓨터로 돌린다고 해도 해독에 수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국정원 직원의 열정과 상상력이 근래 보기 드문 개가를 올렸다.

북한의 오물풍선 도발에 국방부는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날 밤, 북한은 보란 듯이 오물풍선을 또 날려 보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하루 만에 중단됐다. 국방부가 너무 빨리 패를 보여줬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는 북한의 예상 시나리오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대북 확성기 방송 이외에도 오물 풍선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관계당국이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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