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日 선교 책임자의 조선 입국

中 선교때부터 조선에 강한 인상...가우처 목사 편지 받고 방문 계획
1884년 6월 한양에 도착했지만, 日서 고용한 통역 도주
일본서 교류하던 김옥균 만나 병원-학교 세울 고종 '윤허' 받아내

급진적 변혁을 꿈꾸던 노력은 비극적 결말(1884년 갑신정변)을 맞았으나,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통한 개화의 물결이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실은 이전부터 많은 게 준비되고 있었다. 단순히 ‘인간의 의지·계획’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미국 감리교 일본선교 책임자 매클레이 목사 부부가 1882년 이미 일본에서 김옥균과 교류하고 있었으며, 아시아 선교에 큰 관심을 가진 가우처 목사는 1883년 워싱턴D.C.로 가는 기차 안에서 조선의 보빙사 일행을 만나 긴 대화를 나눴다. 이 인연이 감리교 선교본부를 통해 매클레이 목사를 움직여 의사이자 선교사 알렌을 조선에 입국시키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갑신정변에서 중상을 입은 대한제국의 실세 민영익을 살려낸 게 알렌이었고, 이는 최초의 근대 병원 ‘광혜원’ 설립으로 이어졌다(지난 주 내용). 그런 드라마가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매클레이 목사는 1840년대 중국에서 선교를 할 때부터 조선에 대해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1847년 중국 선교사로 갓 부임했을 무렵 푸저우(福州) 길거리에서 중국인들에게 구조된 조선의 난파 선원들을 본 후 이런 소감을 남겼다. "특이한 옷과 꼿꼿한 자세, 날렵한 동작에 나는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내게 큰 광영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1872년 미국 함대가 조선을 다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시 뉴욕에 잠시 머물던 매클레이 목사는 감리교 선교회에게 조선 선교를 시작할 것을 종용하는 글을 잡지에 싣는다.

로버트 매클레이 목사.
로버트 매클레이 목사 부부.
토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교정의 매클레이 목사 기념비.
매클레이 목사가 1856년 중국 양토우(洋頭)에 설립한 동아시아 최초의 감리교회.

1873년 일본 선교 책임자로 선임되어 요코하마에 정착한 매클레이 목사는 그곳에서도 조선인들과 교류한다. "1882년 8월 일본인 신자 한 명이 요코하마로 나를 찾아와서, 조선 정부가 일본이 배우기 시작한 문명을 공부하라고 일본에 보낸 조선인 학생들에게 내 아내가 영어를 가르쳐 주도록 부탁했다. 내 아내는 기쁘게 승낙하고 곧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매우 영민했으며 영어를 배우겠다는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김옥균도 만난다. "아내가 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직후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조선의 관리 김옥균이 찾아와 아내에게 학생들을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서양의 문명을 조선에 소개하고 싶다는 자신의 포부를 얘기했다."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을 즈음 일본에서 찍은 김옥균 사진.

가우처 목사의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는 곧바로 조선으로 건너갈 계획을 짰다. 그러나 1884년 3월, 조선과 일본의 미국 공사들이 조선의 정정(政情) 불안을 이유로 들며 당분간 조선을 방문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선교본부에 보낸다. 그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3개월 후, 다시 한번 주일 미국 공사인 빙엄과 주 조선 공사 푸트에게 조선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한지 문의한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매클레이는 가우처 박사에게 조선을 2주간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듬해에는 원산도 전교지로 적합한지 둘러보겠다고 한다.

1884년 6월 8일, 매클레이 목사는 부인 헨리에타와 함께 영국 증기 여객선 ‘테헤란호’에 승선하여 요코하마를 출발, 나가사키에 들려 조선인 통역을 구한다. 그리고 다시 6월 19일 ‘난징호’로 나가사키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짙은 안개로 오후가 되어서야 부산항에 입항한다. 매클레이 목사는 부산에 도착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산은 역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아마도 일본을 정복해 그 후손들이 아직도 일본을 통치하고 있는 용감한 부족이 출항한 곳도 이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확실한 것은 지난 수 백 년 동안 조선을 괴롭히고 침략해온 일본의 군대들이 이곳에 상륙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일본으로부터 조선 사람들에게 우리 구세주에 대한 신앙, 이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왔다는 사실을 음미해보는 것은 유쾌하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1886년 경의 부산.

매클레이 목사 부부는 부산에 36시간 머물면서 그곳에 상주하고 있던 일본과 조선 관리들, 일본인 기독교 신자들을 만나고 당시 부산해관을 맡고 있던 러벳(William Nelson Lovatt)도 방문한다. 매클레이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부산은 아름다웠고 도로와 집들이 일본풍이었으며 일본인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부산을 출발한 매클레이 목사 부부는 6월 23일 새벽 1시 제물포에 도착해 여관에서 묵은 후, 날이 밝자 육로로 오후 6시쯤 한양에 이른다. 한양에서는 푸트 공사 내외의 영접을 받고 주한 미국 공사관 근처의 숙소에 여장을 푼다.

부산 해관장 러벳.
1883년 개항기의 제물포.

그런데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에서 고용한 통역이 달아나버렸다. 여전히 기세 등등하던 위정척사파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매클레이는 그때 마침 ‘하나님의 뜻’으로 일본에서 알게 된 김옥균을 만난다. 일본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기에 통역도 필요 없었다. 6월 30일 일본어로 작성한 서신을 매클레이가 김옥균에게 보내 고종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한다. 편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에서 ‘의료와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국왕이 윤허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매클레이 목사는 1884년 7월 2일 가우처 박사에게 "조선의 수도에서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게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쓴 편지를 보낸다.

7월 3일, 매클레이는 김옥균을 직접 찾아갔다. "김옥균 씨가 나를 정중히 맞으며 임금께서 전 날 밤 내 편지를 면밀히 검토한 후 요청한 대로 우리 선교회가 조선에서 병원과 학교 설립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다는 윤허를 해주셨다고 전해줬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결정된 바 없으나 곧바로 일을 시작해도 좋다는 부언도 있었다. 우리의 요청에 대한 왕의 호의적인 답이 너무나 즉각적 전격적인 것이어서 모든 게 주님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김옥균 씨에게 깊이 감사하며 그의 집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나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왕의 마음이 강물처럼 주님의 손에 들어 있다. 그분은 그분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마음껏 물길을 돌리실 수 있다."

윤치호는 1884년 7월 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에 예궐하여, 미국 상회에 내해 운항을 허가 할 것, 미국인에게 병원 및 학교의 설립을 허가할 것, 전신 설치를 허가 할 것 등을 아뢰었다." 매클레이는 7월 말 가우처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많은 조선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있으며 국왕 주변의 강력한 인물들이 반대하지만, 국왕 자신은 조선에 학교와 병원을 개설할 선교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보고한다. 아울러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제가 아는 한, 우리교단은 개혁과 진보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조선 정부가 자신들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인정한 최초의 교회"라고 알렸다.

하지만 매클레이 목사는 당시 조선의 정황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한양에 1천 5백 명의 중국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소수의 일본군도 주둔 중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이 원거리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조선의 수도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조선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와일리 감리교 감독은 가우처 목사에게 ‘조선이 열리는 대로 가급적 빨리 안전하고 좋은 때를 찾아 조선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가우처 박사는 교육과 의료 선교를 ‘실력있는 선교사들이 확보되는 즉시’ 시작해야 된다고 밀어붙였다. 그는 그 전년 11월에 자신이 약속했던 2천 달러 기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1885년까지 목사 안수를 받은 선교사 부부와 선교사 의사 부부를 조선에 파견할 수 있다면 추가로 3천 달러를 한양의 부지 매입 비용으로 기부할 것을 약속한다.

한양에서 가우처 박사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매클레이는 "조선에 오는 첫 선교사들이 직면할 가장 큰 시련은 고독일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얻게 될 유익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매클레이 목사 내외는 8월 8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을 떠나기 전, 그는 푸트 공사에게 자신이 묵었던 한옥을 선교본부 건물로 쓸 수 있도록 매입해 줄 것을 부탁한다. 1884년 가을 가우처 박사는 매클레이 목사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 "우리 선교에 적합한 건물을 서울에 매입하는 자금으로 3천 달러를 보낸다"며 또 자금을 기탁했다.(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II, 제 1장 신의 한 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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