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광혜원과 보빙사

보빙사로 워싱턴 가는 기차에서 감리교 亞선교 주도 가우처 목사 만나
가우처, 조선선교 때가 됐다고 판단...日 선교 책임자 매클레이에 편지

급진 개화파의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으나 생각치 못한 ‘개화의 불씨’가 잉태된다. 중상을 입은 민영익이 호러스 알렌 덕분에 되살아난 것이다. 알렌은 그 40일 전쯤 조선에 들어와 있던 의사이자 감리교 선교사였다(개신교 최초의 조선 선교사). 그의 병원설립 허가 탄원서가 ‘광혜원’의 탄생을 이끌어낸다. 당시 서양식 병원과 개신교는 서구 근대의 과학기술과 정신문명의 총화를 전해주는 결정적 매개였다. 장차 국가를 대신해, 조선사람들의 ‘개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일제시대를 거쳐 훗날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었다.

광혜원

알렌의 극진한 치료로 민영익은 목숨을 건진다. 1885년 1월 22일, 갑신정변 발발 두 달이 채 안 됐을 때 알렌은 병원설립 허가 요청 탄원서를 조선 정부에 제출한다. "최근 사태(갑신정변) 이래 조선인 중상자 인체에 박힌 탄환 제거 수술, 기타 부상병들 치료 뿐 아니라 일반 환자들도 진료해 왔습니다…… 이들 대다수 환자들이 멀리 살고 있는데, 민영익을 비롯해 청국 군 부상 병정들을 치료하느라 멀리 사는 환자 집까지 왕진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반면, 일부 부유한 환자들이 기어이 내게 진료를 받고자 근처의 방을 빌려 민박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이들을 손쉽게 매일 진료할 수 있었습니다. 내 자택엔 이같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수용할 만큼의 병원 설비가 부족해 대다수 환자들은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미국 시민으로서 조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 정부가 병원 설비를 갖춰준다면, 서양 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부상 병정들에게 요양처를 제공해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이는 장차 조선 청년들에게 서양 의학 및 공중위생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될 것입니다…… 조선 정부의 배려로 이 일을 주관해 경영하되, 보수는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조선왕실병원’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필요할 때 이곳에 와 진료를 받을 것이며, 일반 백성들은 대군주를 더욱 존경하고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 민영익의 지원으로 병원설립은 일사천리였다. 2월 14일, 알렌은 병원건설안이 ‘어리둥절할 만큼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2월 18일 외아문의 김윤식 독판(외교부장관)이 미국 공사관을 방문해 병원건물 선정을 알리는데, 바로 갑신정변 주역의 한 명이었던 홍영식의 저택이었다. 갑신정변 중 고종과 민(閔)중전을 수행하다 청군에 의해 피살된 인물이다. 영의정을 지낸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자기 손자(홍영식의 아들)를 독살하고 자신도 음독 자살한다. 알렌이 건물을 인수받으러 갔을 때 역적으로 죽은 홍영식의 집은 흉가가 돼 있었다.

"집 바닥은 유혈이 낭자해 그의 가족들이 여기서 살해됐음을 알 수 있다. 홍영식 저택은 철저하게 약탈된 상태였다. 심지어 문짝·창문·난로·서류, 벽에 걸린 물건까지 노략질해 갔다. 위패 두 개가 있었는데, 신주는 없어진 채 껍데기만 나뒹굴고 있었다."

급진 개화를 꿈꾸며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주살된 ‘역적’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이 미국 개신교 선교의 본거지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 병원이 된다. ‘광혜원’은 1885년 4월 9일, 20명의 외래 환자와 3명의 외과 수술 환자를 받으면서 개원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불과 4개 월 만의 일이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 병원인 광혜원. 갑신정변 중 청국 군에 죽은 개화파 홍영식의 집에 문을 얼였다.

보빙사

민영익은 본의 아니게 미국 감리교의 조선 선교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년 반 전, 그는 보빙사에 임명돼 미국을 방문 중 우연히 감리교 아시아 선교를 주도하던 존 가우처 목사를 시카고~워싱턴 기차 안에서 만난다. 이 만남을 계기로 가우처가 미국 감리교로 하여금 조선 선교를 개시하게 만든 것이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은 루시우스 푸트(1826~1913)를 초대 주(駐)조선 공사로 파견한다. 1883년 5월 푸트가 부임하자 고종은 답례로 1883년 미국 보빙사 파견 결정을 내렸다. 이미 청이 워싱턴에 공사관을 개설한 상황이라, 청의 속방인 조선은 상주외교관을 파견할 필요가 없었기에 사절단이라도 보내기로 한다. 정사(正使)에 민영익, 부사(副使)에 홍영식, 서기관에 서광범을 임명하고, 그 외 변수·유길준·고영철·현광택·최돈민과 중국인 통역 한 명 등으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했다.

보빙사 일행.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홍영식·민영익·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

보빙사 파견이 결정되자 푸트 공사는 미국의 친구·동료들에게 보빙사 일행을 극진히 맞아줄 것을 당부한다. 특히 자기 고향인 캘리포니아의 지인들에겐 앞으로 조선과의 교역이 캘리포니아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영접을 부탁했고, 첫 기착지 샌프란시스코에선 보빙사 일행이 군사·조폐 시설, 세관·우체국·공립학교 등을 시찰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푸트는 마침 제물포에서 출항 준비 중이던 미국의 군함 ‘모노카시호’에 보빙사가 승선할 수 있도록 미 해군의 허가를 받아준다. 보빙사는 1883년 7월 16일 제물포를 출항해 나가사키를 거쳐 요코하마로 향한다. 환승 불편 없이 요코하마까지 갈 수 있도록 당시 미 아시아 함대 사령관 크로스비 제독(1824~1899)이 편의를 제공하려 했으나, 보빙사 일행은 사절하고 나가사키에서 일반 여객선으로 갈아탄다. 일행은 1883년 8월 11일 증기선 ‘아라빅호’로 요코하마를 출발, 3주 항해를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제물포에서 나가사키까지 보빙사가 타고 간 미 군함 ‘모노카시’ 호.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보빙사가 타고 간 여객선 아라빅 호.

일행은 미국 육군 사관학교장과 국방장관을 역임한 존 스코필드 장군(1831~1906)의 영접을 받고, 9월 4일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와 무역협회가 개최하는 환영 리셉션에 참석한다.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주일 체류 후 9월 8일 기차를 타고 시카고로 향했다. 9월 12일 시카고에 도착하자 남북전쟁의 영웅 필립 셰리던 장군(1831~1888)이 나와 맞이한다. 일행은 1박 2일 머문 다음, 9월 13일 시카고 정부 및 국방 당국의 접대를 받고 마침 개최 중이던 시카고 박람회를 관람한 후 그날 밤 10시 기차로 시카고를 떠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빙사를 영접한 존 스코필드 장군.
시카고에서 보빙사를 영접한 필립 셰리던 장군.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보빙사 일행과 존 가우처 박사(1845~1922)의 만남이 우연히 이뤄진다. 감리교 목사이자 볼티모어시 소재 가우처 대학의 설립자인 그는 당시 아시아 선교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가우처와 보빙사 일행은 기차 여행 이틀 간 통역사를 사이에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눈다. 조선 선교의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한 가우처 박사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1883년 11월 6일, 가우처 박사는 감리교 선교위원회 연례 회의에서 부인 메리 여사와 함께 ‘조선 선교를 돕고 싶다’며 조선에 선교본부 개설 후 선교사 부부 한 쌍이 책임을 맡아준다면 2천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감리교 선교위원회는 일본 선교본부가 조선 선교를 시작하는데 쓸 수 있도록 3천 달러를 추가 배정, 투표를 통해 ‘존 F. 가우처 목사의 특별기부금 2천 달러’가 더해진 5천 달러를 의결한다.

1884년 1월 31일 가우처 박사는 일본 선교를 책임진 로버트 매클레이(1824~1907)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1883년 11월 6일 선교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은자의 나라’ 조선에도 전교가 필요하며 일본 선교회 감독 하 조선 선교회 설립이 필요하다 생각하신다면 2천 달러 가량을 기꺼이 보낼 의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매클레이 목사님은 혹시 조선에 직접 가서 사들일 부지를 찾아보고 선교회를 세우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교회가 이 이방인의 땅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개신교 교단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이렇게 영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묘하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성공한다면 매클레이 목사님의 그 동안 헌신에 걸 맞는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가우처 박사의 편지는 매클레이 목사에게 "오랫동안 꿈꿔 왔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 목사는 "조선선교 개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II: 친미기독교파 1, 제 1장 신의 한 수’ 중에서]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