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이들이 한일관계 모범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을 꼽는다. 실제로 김 대통령은 재임 중 일본을 방문해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미래 지향적인 합의안을 도출했다. 위안부 문제로 양국관계가 경색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며, 다방면의 교류 강화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김대중식 접근은 실은 문재인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이 공유해온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위안부 회담 타결 직후인 2015년 말 박근혜 대통령이 발표했던 메시지도 그쪽이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건, 5공 시절의 대일 외교가 엄청 전향적이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회고록>을 보면 1980년대 한미 밀월시대 개막과 함께 대일관계가 순조로웠던 걸 자못 자부하고 있다.
한국 국가원수의 일본 공식방문도 전두환 대통령이 처음이다. 그는 "일본 방문 자체가 가해자(일본)에 대한 용서의 뜻을 함축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걸 디딤돌로 또 한 번의 진전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었다. 일왕이 했던"통석(痛惜)의 염(念)"이란 사과가 나왔던 그때 말이다.
중요한 건 노 대통령의 일본 의회 연설인데, 이게 대박이다. "오늘의 우리는 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자성할 뿐, 지난 일을 되새겨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기에는 동경을 출발한 일본 젊은이들이 현해탄 해저터널을 가로질러, 서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북경과 모스코바로, 파리와 런던으로 대륙을 잇는 우정의 동반여행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 한일관계에 국한해 볼 때 가히 역대급 연설이다.
세월이 흘러 23년 뒤 또 다른 명연설이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연설문이다. 좀 느닷없다는 판단이 들 정도로 파격이다.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의 협력 파트너란 담대한 선언 말이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는 시원시원한 발언에 속한다.
오죽했으면 야당이 일본 과거사 문제에 면죄부를 줬다며 와글댈까? 저들 머리 속엔 반일 죽창가를 불렀던 문재인식 반일 외교밖에 들은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런 저들이 시끄러울수록 윤 대통령의 연설은 성공적이란 뜻이다. 그럼 모든 게 오케이일까? 아니다. 이걸로 징용공 문제나 위안부 문제가 다 풀린 건 아니다. 잘 풀어가자는 원칙선언에 불과하다. 새로운 한일관계 이제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