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열
정창열

김정은이 지난 2023년 12월 30일 열린 당 전원회의 제 8기 9차 전원회의 5일차 회의 결론 연설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해 정권붕괴와 흡수통일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 전제하고, 남북 관계를 ‘적대적, 교전 중인 두 국가관계’로 정의했다.

이듬해 1월 1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우리 공화국의 력사에서 통일·화해·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평양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철거해 버릴 것"을 주문하는 한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그동안 남북 간 회담 및 교류 협력을 담당해 온 부서의 폐지를 결정했다. 김정은 지시에 따라, 북한은 통일3대헌장기념탑 철거를 비롯해 같은 민족으로서의 흔적 지우기를 급속하게 진행했다.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에 대해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선대 독재자들이 추진해 온 통일정책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평가했다. 이른바 ‘김정은의 홀로서기’ 정책의 일환으로 본 것이다. 대단히 안이한 판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김일성·김정일의 연방제에 의한 민족통일이든, 김정은의 영토완정이든,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점령하겠다는 기본적인 대남 정책 속성은 동일하다. 다만 김정은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라고 규정한 것은 같은 민족에게 핵을 사용했다는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간교한 꼼수일 뿐이다. 이는 김정은의 "만일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핵 위기 사태에 신속히 대응하고 유사시 핵 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하겠다"는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일견 한반도 전역에서 핵무기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묘수처럼 보이지만, 배후에 훨씬 위험한 함정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단견이다.

장자의 ‘산수편’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나온다. 당랑포선 부지황작재후(螳螂捕蟬 不知黃雀在後). 사마귀가 뒤에서 참새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줄 모르고 매미를 잡으려다 결국 참새에게 잡아먹힌다는 이야기다.

최근 김정은이 중국 전승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 중국과 북한은 외형적으로는 상당한 밀착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중국이 북한 지역을 미국에 대응하는 일종의 완충지대(Buffer Zone)로 간주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시대의 ‘피로써 맺은 동맹’ 관계와는 결이 다르다. 중국은 북한 내부에 변고가 발생해 완충지대 역할이 종료됐다고 판단할 때 일거에 북한 지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막연한 기우(杞憂)가 아니다. 중국이 지난 2002-2007년 중국과 청대(淸代) 영토를 기준으로 인접했던 세력들을 지방정권 및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중화민족이라는 틀에 가두려고 진행한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그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정은이 중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며, 중국은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다루기 위해 미군 철수를 주장한다’고 말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일성 시기부터 있었던 ‘미국은 100년의 적, 중국은 1000년의 숙적’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경계심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적대적이든 평화적이든 ‘두 국가론’을 전개하면, 북한에 대한 연고권을 상실함으로써 중국이 북한 지역 진출을 시도할 때 이를 제지할 명분이 없어진다. 이는 민족 배신행위이자 5000년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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