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주
손광주

최근 국제정치 분야에서 인상적인 연구자는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이다. 그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조선일보 11월 11일)에서 "한미 양국은 여전히 중요한 파트너임에 틀림없지만 앞으로 한국은 미국 없이 아시아 안보를 어떻게 설계할지, 미국 없이 민주주의 국제연대를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애플바움은 공산전체주의에 내공이 깊다. 구소련 스탈린 체제의 강제수용소를 기록한 <굴락의 역사>(Gulag: A History)로 2004년 퓰리처 문학상(논픽션)을 받았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탄탄한 역사관과 현장의 실체에 접근하는 안목과 필력이 돋보이는 여성이다.

필자는 그의 통찰력이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오랜 실증적 연구의 결과로 본다. 공산전체주의에 대해 심층적 공부가 선행(先行)된 연구자일수록 국제정세에 관한 분석·전망의 수준이 높다. ‘상대’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수록 분석의 수준도 허약해진다.

우리의 ‘상대’는 누구인가. 중국·러시아·북한이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권위주의 국가’(Authoritarian State)로 통칭한다. 하지만 ‘권위주의’라는 정치학적 용어로는 이들의 실체에 접근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이란도 분명한 권위주의 국가이지만 이들과 또 다르다.

러시아는 1991년 구소련 붕괴로 이미 한번 사망한 체제다. 근본 원인은 경제 건설의 실패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출발이 경제결정론적 유물사관인데,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거대한 모순이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기 인민공사·대약진 운동의 실패, 소련의 경제 건설 실패를 거울로 삼아 시장을 받아들였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다. 경제 건설은 원시사회 물물교환 시기부터 수 만년을 이어온 시장의 역사 현장에 노하우가 쌓여있는 것이지, 지식인(마르크스)의 펜끝(자본론)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시장을 받아들여 생존과 발전에 일단 성공했지만 정치 체제는 중화민족주의 전체주의독재로 다시 퇴행 중이다. 역사와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반동이기 때문에 오래 가긴 어렵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거의 죽었다가 핵개발 생존 프로젝트로 한·미·일과 국제사회를 속이는 데 성공하고, 최근 러·중과 밀착하면서 기사회생의 길목에 들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 체제는 여전히 스탈린 시기보다 더 나쁜 세습수령독재. 쉬운 말로 노예주(수령)와 노예(인민대중) 사회다.

따라서 중·러·북은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ism)라기 보다 여전히 군사주의·민족주의를 앞세운 파시즘(Fascism)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대중을 상대로 한 감시·통제·세뇌의 방식이 디지털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군 열병식처럼 겉으로는 강고해 보인다. 하지만 파시즘의 최대 약점이 내부가 허약한 것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한·미·일·유럽은 중·러·북의 내부를 먼저 흔들어야 하는 것이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2001년 5월 창설 50주년을 맞은 자유유럽방송(RFE)에 보낸 축하 메시지가 "전체주의 소련체제 붕괴에 기여한 RFE의 공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아시아방송(RFA)·미국의소리(VOA)를 중단시켰다. 어리석은 판단이다.

최근 1~2년 코로나 봉쇄가 끝난 북한은 러시아 파병을 계기로 중국·동남아 등 대외 원심력을 넓히는 중이다. 근본 이유는 돈(정권 유지 비용) 때문이다. 북한이 대외 원심력을 넓히는 현상은 일단 고무적이다. 90년대 이후 비록 제한적이지만 봉쇄-개방-봉쇄-개방을 되풀이하며 내부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의 대응이다. 중국의 디지털전체주의가 중국 내 감시·통제를 넘어 한반도는 물론 세계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 때문에 북-중 국경을 통한 탈북도 어렵게 됐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가 되었다.

북한이 대외 원심력을 높일 때 우리의 선택은 2트랙이다. 김정은 정권을 대화로 끌어내는 것은 한·미·일 공조가 필요하다. 동시에 북한인권을 이슈로 한 민간과 국제연대의 역할을 높이는 것이다.

지난 1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주민들 대상으로 대북인터넷방송 KIS(대표 이영현)가 창립식을 가졌다. 적절한 타이밍인 것 같다. 언젠가 북한 주민들도 인터넷 세례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길은 방어(defense)가 아니다. 외부 세계와 내부 주민이 손잡는 것이다. 트럼프·이재명 둘다 빨리 깨달아야 한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