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세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

한·미 관세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29일 김용범 대통령 정책실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경주 정상회담 담판을 통해 관세 협상 세부 내용에 합의했다. 최대 쟁점이던 한국의 3500억달러(약 500조원) 대미 투자금 가운데 현금 직접 투자 규모를 2000억달러로 하되, 연간 투자 상한을 200억달러로 묶었다. 미국은 7월 30일 한·미 관세 협상 타결 후 투자 패키지 대부분을 현금 투자로 하고, 대부분 단기간에 ‘선불’로 자국에 보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외환 위기’ 우려를 강력히 제기한 한국 측의 주장을 수용해 미국이 분할 투자안에 동의하면서 극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한·미는 핵심 쟁점인 현금 투자 규모를 두고 치열한 협상을 거듭해왔다. 우리 정부는 3500억달러 가운데 5% 이내 수준에서만 직접(현금) 투자를 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보증으로 채우겠다는 구상이었지만, 일본이 먼저 ‘백지수표’ 식 MOU에 서명하면서 일본식 조건을 받으라는 미국의 강한 압력에 노출됐다. 이후 정부 내에서는 일본과 경제 규모 차이, 원화와 기축통화인 엔화의 위상 차이 등을 고려했을 때 일본식 투자안을 받을 경우 한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급부상했다.

결국 정부는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일본, 유럽보다 불리한 조건에 처했다는 내부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국익 극대화’ 차원의 합리적 대미 투자 패키지 구체화 방안을 찾겠다면서 사실상 ‘배수진’을 치고 협상에 임했다.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타임 인터뷰)이라던 이 대통령의 공개 언급은 이런 우리 정부의 당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래픽=박덕영 기자
/그래픽=박덕영 기자

정부는 대외적으로 강경 태도를 견지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측을 합리적 논리로 설득하는 강온 양면 전술을 병행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을 채널을 중심으로 이뤄진 대미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조선 등 미국의 제조업 부흥을 일으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 산업 파트너라고 강조하면서 한국에 무리한 투자 요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 전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공개적으로 한국의 각료 중 김 장관을 꼭 집어 "터프한 협상가라고 들었다. 조금 더 능력이 부족한 분을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은 일본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은 5500억달러 전체를 현금 투자 중심으로 하는 합의에 서명했지만, 한국은 3500억달러 투자 패키지 중 2000억달러를 현금 투자로 하되 나머지 1500억달러는 미국 조선 산업 부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에 별도로 할당하는 데 성공했다.

마스가 협력에 관한 투자는 한국 주도로 진행되고, 한국 조선사의 직접 대미 직접투자(FDI)와 국내 공적 금융기관과 민간 은행의 보증 등까지 두루 가능한 구조로 집행될 예정이라고 대통령실은 설명한다. 한화그룹 필리조선소의 사례처럼 미국 조선 산업 부흥 흐름을 타고 한국 조선사들이 주도적으로 대미 투자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정부의 직접 부담이 되는 대미 투자 규모를 실질적으로 1500억달러 줄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이를 제외하고도 투자처 선정, 투자 이익 배분 등과 관련해서도 한국 측의 입장이 추가로 수용돼 미일 투자 MOU에 없던 조건들이 추가됐다. 투자 MOU에는 ’원리금 회수가 보장되는 상업적 합리적인 프로젝트만 추진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기로 했다.

프로젝트별 투자 자금도 ’선불‘로 먼저 미국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진행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지급된다는 내용이 합의됐다. 이 밖에도 프로젝트별로 특수목적법인(SPV)을 세워 자본금을 대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전체 투자 프로젝트를 한데 모아 관리하는 ’엄브렐러(우산) 구조‘로 투자 펀드를 운영해 특정 프로젝트에서 손실이 나도 다른 여유 있는 프로젝트에서 한국에 돌아가는 몫을 늘리는 ’안전장치‘도 확보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한·미 관계 설정의 가장 큰 난관이던 3500억달러 투자 방안을 놓고 한·미가 의견을 모았지만 투자 MOU 서명은 특별법 제정과 국회 동의를 거쳐야 실행이 가능하다. 자동차 관세 인하(25→15%)와 향후 적용될 반도체, 의약품 등 최혜국 대우는 한국의 이 같은 절차가 마무리된 뒤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김용범 실장은 "우리는 (한·미 투자) MOU에 MOU 서명을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하고, 법이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며 "이름은 몰라도 대미 투자기금이 신설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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