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말(言)로 시작하는 것이 맞다. 29일 APEC 개막 첫날 여러 말들이 쏟아졌다. 관심은 이재명·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추진잠수함 연료 공급을 요청하는 한편 방위비 증액을 약속했다. 우리도 방위산업으로 대한민국 자체 방위 역량을 대폭 키울 것이라고 했다. 관세협상과 맞물린 대미 투자와 관련해선 "대미 투자, 구매 확대를 통해 미국 제조업 부흥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양국간 예민한 의제인 3500억 달러 투자 문제는 실무회의에 남겨둔 모양새다.
눈여겨 볼 대목은 이 대통령의 개막 연설이다. 세계적 행사는 주인공의 첫 연설이 거의 성공의 절반이다. 이 대통령 연설은 큰 행사의 총론을 짚은 모양새는 됐다. 이 대통령은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우선주의가 고개를 들며 당장의 생존이 시급한 시대에 연대의 플랫폼으로 APEC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지난 2005년 부산 APEC을 환기하면서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 체제를 지지하는 APEC의 단합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그때와 오늘의 대외적인 환경이 많이 달라 협력과 상생, 포용적 성장이란 말이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겠다"며 "이러한 위기 상황일수록 역설적으로 연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목은 트럼프발 관세전쟁을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말 속의 뼈다. 언중유골(言中有骨). 트럼프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 알 수 없다. 트럼프 스타일대로라면 귀담아듣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 주장은 말 자체로서 틀린 건 아니다. 다만 현 국제정세의 객관적 상황에서, 이 대통령 연설은 중국의 주장과 거의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중국은 다자주의 WTO(세계무역기구) 체제 존속·유지 입장이다. 트럼프는 WTO 체제를 이미 깨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20년 전 APEC의 단결된 의지를 모아냈던 대한민국이 다시 APEC 의장국으로서 위기에 맞설 다자주의적 협력의 길을 선도하려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무거워야 한다. 실천이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은 곧 그 나라 국민의 말의 총합으로 외국에 비쳐진다. 자신이 한 말을 ‘그냥 말로써 멋있게 해본 것 뿐’이라고 퉁치면 안된다. 이 대통령의 연설을 21개 참가국 대표들이 어떻게 들었을까. 순간 ‘어? 대단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가 과연 "위기에 맞설 다자주의적 협력의 길을 선도"할 수 있나. 말은 짧고 실천은 길다. 이재명 정부의 허약한 내공이 드러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