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이야기가 있다. 헌법재판소가 설치된 건 1988년이다. 그 이전엔 위헌 법률 심판 등을 대법원이 했다. 이는 미국식이다. 우리는 독일식을 도입해 헌법재판소를 만들었다. 헌법재판을 하는 재판소인 만큼 당연히 대법관 수준의 법관이 헌재에 가야 했다. 문제는 실력 있는 법관들이 가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헌재에 가면 골치 아픈 정치적 사안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법관들은 민감한 정치 사안에 몸을 사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들은 공격적, 법관들은 수세적이다. 법관들의 수세적 태도 때문에 지난해부터 사법부가 스스로 망가졌다는 게 세평이다. 과거에는 가인 김병로, 전주 출신 대쪽 판사 김홍섭, 통영 대꼬챙이 이일규 등 ‘하늘이 무너져도 법을 지킨’ 판사들이 있었다. 이회창도 대쪽 판사로 통했다.

지금 사법부엔 대쪽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목을 빼고 기다리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법을 지키겠다는 판·검사들이 나와주는 것이다. 사표를 내는 것은 개인 차원 의견 표시밖에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법률가의 양심으로 헌법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27년 만에 모인 한국법학자대회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충돌했을 때는 ‘헌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27일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명 권력인 사법부가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사법 심사’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 민주주의에 충실해 하위 일상 정치를 심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확한 해석이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가주권을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에 집약해 놓은 것이 헌법이다. 법률을 제정하는 국회는 국민의 주권 아래에 있는 만큼 헌법에 구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국회가 법률을 제정하는 곳이니까 사법부는 입법부가 만든 구조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 무식한 국회의원들이 유독 22대 국회에 적지 않다.

뒤늦게 검사들도 움직이는 것 같다. 검찰청 폐지에 항의하는 전직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들이 26일 입장문을 내고 "위헌 소송을 내겠다"고 했다. 판검사들이 스스로 법을 지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들을 대신해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국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