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권혁철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은 언제나 제도적 껍데기를 유지한 채 서서히 진행된다. 선거는 계속 치러지고 헌법은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권력의 분립은 사라지고 모든 기관이 행정부의 하위 부속물로 전락한다. 그 첫걸음은 대개 사법부에 대한 공격에서 시작된다.

최근 여당 지도부가 대법원장을 정면으로 겨냥해 사퇴를 요구한 사태는 결코 단순한 정쟁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허물고 권력 집중을 정당화하려는 위험한 조짐이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비슷한 사례를 보아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다. 1999년 선출된 차베스는 처음에는 ‘민중의 구원자’로 불렸다. 그는 부패한 기득권을 청산하고, 석유 수익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 확대 전략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전장치를 하나씩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사법부 장악이다. 차베스는 집권 5년째인 2004년 대법원 규모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새로 생긴 자리에 충성파 판사들을 대거 임명했다. 그 결과 대법원 다수는 차베스의 통제 아래 놓였고, 정권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후 대법원은 차베스의 국유화 정책, 언론 통제, 야당 탄압 등 각종 조치를 합헌으로 선언하며 정권의 방패 역할을 했다.

사법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판사들은 가차 없이 숙청됐다. 마리아 루르데스 아피우니 판사는 정부에 비판적 성향을 보였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차베스는 직접 TV에 나와 그녀를 "범죄자"라며 공격했다. 법관의 독립성은 완전히 무너졌고, 사법부는 행정부의 하위 기관으로 전락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형식을 유지했지만, 사실상 권위주의 체제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법원장 공격은 이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여당 지도부는 내란 사건 재판 지연 문제를 빌미로 대법원장의 책임을 묻고 있다. 대통령실 역시 대법원장 사퇴론에 ‘원칙적 공감’을 표명했다가 부랴부랴 해명했지만, 이미 사법부 독립성에 치명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대통령 본인도 ‘선출권력’ ‘임명권력’ 운운하면서 ‘선출권력이 임명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사실상 부인한 발언이다.

이런 흐름을 단순히 ‘정치적 공세’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법부는 행정부나 입법부와 달리 국민의 직접적 의지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독립성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마지막 방파제로 여겨지고 있다. 만약 법관이 정치권 눈치를 보게 된다면, 재판은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권력자의 이해를 관철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사실상 종말을 의미한다.

더구나 한국의 제도적 현실은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대통령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 의회와 법원의 독립성은 취약하고, 국민의 기대 심리 또한 대통령 개인에게 쏠려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대통령 권력은 위기 상황마다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코로나19 사태를 ‘전시’에 비유하며 의료인을 질타한 발언, 내란 재판을 빌미로 한 대법원장 공격은 모두 ‘비상 상황’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권력 집중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차베스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방식은 총칼의 쿠데타가 아니었다. 그는 선출된 권력이라는 정당성을 내세워 의회를 장악하고, 사법부를 무력화한 뒤, 결국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다. 한국이 지금 그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법부에 대한 공격은 일부에서 말하듯,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 선거법 유죄 판결을 뒤집으려는" 그런 단순한 차원의 공세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를 겨냥한 공격이다. 차베스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길을 지킬 것인가. 오늘 한국 사회가 마주한 선택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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