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은 개신교의 507번째 생일이다. 원래 이런 글은 그 날 이전에 쓰는 게 관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봐야 해서 글이 날짜보다 밀렸다.
무엇보다 기독교 우파와 기독교 좌파는 확실하게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507주년 행사를 두고 기독 우파는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반면 기독 좌파인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시편에서 가져온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를 들고 나왔다.
사랑과 진실 그리고 정의와 평화라. 어디서 많이 들었던 단어들이다. 귀에만 단 것뿐인 이런 공허한 미사여구는 가톨릭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세계 평화를 기원합니다",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가톨릭 지도자들이 주로 하시는 말씀들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회개혁실천연대는 기독 우파의 10월 27일 연합예배에 대해, 뉴 라이트 역사관을 추종하고 동성애를 혐오하여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주류교회들이 모여 자기 세력을 과시하는 자리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건강한 가정과 거룩한 나라가 어떻게 뉴 라이트와 연결되지는 내 추리력의 밖이다. 아마 그 분들도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비판의 진짜 타깃은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의 하위 메뉴인 동성애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막자는 집회 취지다.
예전에는 동성애를 동성연애라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동성애(homosexuality)의 사전적 의미는 동성 간 성적인 끌림과 성적인 행위(行爲)다. 그러니 동성애보다 동성 ‘연애’(sexuality)가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이걸 동성애 우호 진영에서 결사적으로 달려들어 기어이 ‘연’자를 빼냈다.
이 어휘의 최종 진화가 ‘브로맨스’(bromance)다. 조각같이 생긴 남자배우들이 우정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연기하면서 브로맨스는 뭔가 아스라하고 따뜻하면서 심지어 감미롭기까지 한 단어가 되었다. 짝짝짝. 노고를 치하한다(라고 쓰고 ‘취하’라고 읽고 싶다).
이렇게 화장한 단어를 이제 법의 보호에 밀어 넣겠다는 것이 차별금지법이다. 이는 동성애 미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행동하는 것까지도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설마 이걸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면서 자신들의 신앙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분들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정당할까. 동일 진영으로 분류 가능한 분이 쓴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라는 책이 있다. 동성애 금지는 무시간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성서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바뀌어야 하는 편견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동원한 쪽수가 무려 368페이지다. 말이 많다는 건 논리가 궁색하다는 얘기다. 성경에서 한 구절로 금한 것을 깔끔하게 격파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역시 딱 한 구절만 드는 거다. 그런데 없다. 그러니 글이 길어진 것이고 성서가 퀴어를 옹호한다는 제목과 달리 실제로는 저자가 열심히 뛰는 것이다.
연합예배와 같은 날 교회개혁실천연대와 유사 사고(思考) 단체 몇은 종교개혁 연합예배를 봤다. 사회적 신뢰를 잃어 가는 한국교회의 추락을 가슴 아파하며 종교개혁 정신의 본질을 되찾자는 취지란다. 설교 시간에는 한국교회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가 되기 위해서는 루터와 결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거 진심으로 찬성이다. 제발 모쪼록 결별해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반으로 가르려는 세력 때문에 가뜩이나 심란한 한국 교회가 또 흔들린다. 차라리 딴 살림 차려나갔으면 좋겠다. 이 날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250여 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