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의 반도체 기업 인텔이 최악의 위기에 빠졌다. 수십조원을 투자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분할·매각될 처지에 빠졌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파운드리 사업에 재진출하며 ‘반도체 왕국’ 재건을 노리던 인텔의 승부수가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면서 투자자는 물론 미국 반도체 업계에도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것이다.
인텔의 구조조정이 현실화되면 삼성전자-인텔-TSMC의 ‘파운드리 삼국지’는 대만 TSMC의 독주체제로 굳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글로벌 파운드리 2위 기업인 삼성전자 역시 TSMC에 도전을 준비하고 있어 향후 판세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블룸버그는 인텔이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등 월가의 투자은행과 함께 대대적인 사업 재편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 계획을 재검토하는 것은 물론 파운드리 부문을 아예 분리하는 방안까지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3년 전 파운드리 사업에 복귀한 인텔은 전 세계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자사 물량 규모를 믿고, 반도체 제조 부문에 의욕적으로 투자했다. 인텔의 CPU만 찍어내도 파운드리 2위 삼성전자에 맞먹는 수주 실적이 쌓일 수 있는 데다 유일한 미국 파운드리 기업이라는 강점까지 앞세워 선두 TSMC와의 진검승부를 예고했다.
하지만 투자 비용이 예상을 뛰어넘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이 인공지능(AI) 시대 패권이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로 넘어가면서 주력인 CPU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올해 인텔의 주가는 60% 이상 폭락했고, 올해 2분기에만 2조원 넘는 손실을 내면서 1968년 회사 창립 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
그동안 인텔의 반도체 제조부문 분리 가능성이 꾸준히 나왔지만 칩 설계·제조 패권을 모두 쥐겠다는 인텔 경영진의 입장이 확고해 번번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회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리면서 결국 밑 빠진 독으로 전락한 칩 제조 부문을 떼어내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인텔의 추락은 첨단산업 제조 패권을 되찾겠다는 미국의 앞길이 험난할 것임을 예고한 대표적 사례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부는 2022년 발효한 반도체법에 따라 국내외 주요 반도체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첨단 제조 공장을 유치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반도체 업계는 인텔이 미국 반도체법 지원 대상인 공장 규모를 축소하거나 투자를 줄이게 되면 관련 보조금이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는 삼성전자에 이전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5세대 HBM인 HBM3E 8단을 납품하기 위한 퀄테스트(품질 검증)를 진행 중인 가운데 파운드리 점유율 확대에도 역량을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일류 경쟁력과 기술 리더십을 통한 미래 인공지능(AI) 메모리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TWO)트랙 전략인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6월 12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4’를 개최하고 AI 시대를 주도할 파운드리 기술 전략을 공개했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메모리, 어드밴스드 패키지 등 사업 분야간 협력을 통해 고성능·저전력·고대역폭 강점을 갖춘 통합 AI 솔루션을 선보여 고객 편의 제고는 물론 제품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