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문학도서관 소전서림에서 소리꾼 안이호의 수궁가를 관람했다. 그런데 ‘관람했다’라는 표현보다는 ‘함께했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소전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소전서림은 인문학에 집중하는 도서관으로 젊은 작가의 문학 창작을 후원하고, 북아트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며, 문학과 연계된 다양한 강연과 공연을 기획하기도 한다. 이번 수궁가 공연은 ‘소전 탐미 생활-숨은 그림 찾기: 행간의 사람들’의 한 줄기였다.
본디 소리꾼 안이호는 정통 판소리에서 이미 적수가 없는 젊은 명창이었지만, 정작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퓨전 국악 밴드인 ‘이날치 밴드’ 덕이었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합작한 ‘범 내려온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중심의 안이호는 이제 국내를 사뿐히 넘어 세계 무대에서 우리 소리의 새로운 매력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책으로 둘러싸인 도서관의 한 공간. 한쪽 책장을 무대로 삼았고, 임시로 놓은 관객용 의자는 서른 개 남짓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안이호가 고수 고정훈과 함께 2층 서가에서 등장했다. 목을 풀기 위한 단가(短歌) 하나를 시원하게 뽑아내고, 본격적인 수궁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이호는 모두가 알고 있는 수궁가의 뻔한 줄거리를 읊지 않았다. ‘숨은 그림 찾기: 행간의 사람들’이라는 기획 의도에 맞게 몇몇 중요한 대목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기지를 발휘했다. 안이호는 토끼와 별주부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토끼의 ‘욕망’을 분석했다.
소리꾼 안이호는 대단한 재담꾼이었다. 외형상으로는 ‘해설이 있는 판소리’다. 하지만 재담과 노래의 연결이 물 흐르듯 매끄러워 마치 강의와 공연이 하나로 합쳐진 총체극을 보는 듯했다. 설명의 끝부분에 쉼을 두지 않고 곧바로 노래와 연결했고, 이어 노래가 끝나는 부분과 설명 부분에 문지방도 없었다. 깊이 있는 해설은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닌 질문 형식이어서, 옹기종기 모여 앉은 관객의 참여가 매우 높았다. 판소리 대목은 소리(창), 아니리(말), 너름새(몸짓)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고, 구경꾼들이 절로 ‘얼쑤!’ ‘좋고!’ 등의 추임새를 소리꾼에게 던졌다.
이렇게 안이호는 공연 기획자의 의도인 ‘행간을 드러냄’을 너머 ‘행간의 맥’까지 짚어 냈다. 그 맥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재치와 해학 그리고 기발한 효과와 극적 긴장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소리꾼 안이호가 해설과 노래의 행간을 신명 나게 노니는 동안, 관객들은 강의 청강생과 소리판 구경꾼을 넘나들며 함께 덩실댔다. 공연 내내 토끼처럼 두 귀가 쫑긋했는데, 하나는 재담을 듣고 새기는 두뇌의 귀였고 다른 하나는 노래에 공명하는 마음의 귀였다.
우리 국악은 서양음악과 음계·악기·악곡의 형식 등 모든 면에서 근원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음악 자체보다 무대와 관객의 관람 태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서양은 소리를 공간에 가두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 오페라 하우스, 대성당, 콘서트홀을 떠올려 보자. 외부 소리가 철저하게 차단된 공간에서 다수의 청중이 모여 듣는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자신을 돛대에 결박한 오디세우스처럼 청중은 강요된 자세와 침묵으로 음악만 감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음악은 다르다. 딱히 연주하는 무대를 특정하지 않는다. 음악에 바람 소리, 새 소리, 냇물 소리가 어우러지고 여기에 저잣거리의 웅성임과 몇몇 구경꾼의 추임새가 함께 한다. 이것이 바로 서양 음악에는 없는 우리의 ‘풍류’다.
도서관의 한쪽 무대, 재담꾼의 재간과 소리꾼의 노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구경꾼의 들썩임. 소전서림이 펼친 판은 서양음악이 그어놓은 연주자와 청중의 경계가 사라진, 그야말로 제대로 된 풍류를 만끽한 호사였다. 다음에 이어질 ‘소전 탐미 생활-숨은 그림 찾기: 행간의 사람들’이 벌써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