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조정 못지않은 지방 관아 부패

여러 파 갈려 자리다툼 했지만, 전체 이익 위협받으면 서로 도와
재판 판결도 뇌물이면 뒤집혀...정부는 도둑질 위한 장치에 불과

19세기 20세기 초 한반도의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최고의 증언자가 천주교·개신교 선교사들이다. 구한말 왕실·조정의 무능과 부패, 백성들의 열악한 삶을 이해하지 않는 한, ‘외세에 의한 망국이라는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일감정은 영원한 질곡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한일관계 개선 또한 난망하다. 한일관계 파탄은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며, 국제정치세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 때문이다. 불교국가 고려를 극복하며 14세기 성리학 국가로 출발한 조선은 한반도 문화사·정신사의 커다란 도약이었으나 500년 지나 적폐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식민지 체험을 통해 근대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에 편입된 것은 결코 남의 탓이 아니다. 구한말의 이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이 땅에 축적된 역사적 체험, 민초의 생명력과 세계정세·국제역학을 꿰뚫어보는 당대 지도자의 역량이 맞물려 일본 패망 직후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조선의 아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보좌진으로, 대부분 현지 출신이었다. 급료가 따로 없었고 현지 토호 및 백성과 권력자 사이를 오가며 실권 실익을 누렸다.
조선의 아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보좌진으로, 대부분 현지 출신이었다. 급료가 따로 없었고 현지 토호 및 백성과 권력자 사이를 오가며 실권 실익을 누렸다.

지방 관아의 상황도 조정 못지 않았다. 지방의 관아는 중인 계급에 속했던 아전또는 향리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고을마다 아전의 수가 꽤 많다. 주요한 6~8명은 대신들과 비슷한 관직명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성질의 직무를 작은 규모로 수행한다. 그것은 각 지방 관청이 중앙 정부의 본을 따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에 그들을 하인 취급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대로 질질 끌려가는 수령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다른 아전들은 위에 말한 아전들에게 복종하는 서기나 수위, 또는 하인들이다. 이 모든 아전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계급 같은 것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자기들끼리 혼인하고, 그들의 자제들은 같은 직업을 택하며, 직무를 얻고 유지해 나가는 수완에 따라 대대로 재판소에서 높거나 낮거나 한 직무를 수행한다. 그들이 없으면 행정이 되어 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실정을 살펴보면 옳은 말인 것 같다. 온갖 농간·음모·계략에 능숙하므로 그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수령에 대하여 자신들을 지키는 데 놀랍도록 정통해 있다. 파면·축출·모욕·구타하여도 그들은 모든 것을 참아 견딜 줄 알며 복직 할 기회를, 또 어떤 때는 심지어 너무 엄격한 수령들을 내쫓을 기회를 잡으려고 엿보기도 한다.

아전들은 정부로부터 정식 급료를 받지 않았다. 이는 조선 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따라서 향리들은 백성들을 수탈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상전인 고을의 수령들도 철저하게 속여야 했다. 수령에게 고을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린다면 자신들 운신의 폭은 그만큼 좁아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노론·남인 등 큰 붕당(朋黨)과 거의 비슷하게 그들도 여러 파로 갈라져 자리다툼을 하고 있기는 하나 그들 전체의 이익이 위협 받을 때에는, 당분간 싸움을 잊고 서로 도울 줄 안다. 그들의 근본 원칙의 하나는 언제나 수령을 속여야 하며, 그에게 할 수 있는 대로 그 지방의 사정을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활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이 정규 급료가 없고, 있다 해도 받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백성을 희생시켜 가며 수령의 끝없는 탐욕을 만족시켜야 하고 또 한편 자기들과 가족들의 생활비로 많은 돈을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사기와 주구(誅求)만으로 살아 가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이용해 먹을 줄 아는 비밀 자원을 수령에게 알게 한다면, 수령은 즉시 그것을 뺏을 것이고 자기들에게는 굶어 죽는 길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날 한 아전이 다블뤼(Daveluy) 주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약에 불행히도 한 번 원님에게 아주 좋은 무언가를 드릴 것 같으면, 원님은 그것을 늘 원할 텐데, 우리는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지를 못할 것이므로 그분은 우리를 때려 죽이게 하실 것입니다."

다블뤼 신부가 전하는 일화는 당시 조선의 지방 통치의 난맥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몇 해 전 경기도에서 일어난 다음 사건은 아전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꽤 큰 어떤 읍에 정직하고 유능한 수령이 부임했는데, 그는 부하들이 직무를 다하도록 강력히 다루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이 전에 저지를 모든 독직(瀆職)행위를 조사하여 처벌 할 뜻을 밝혔다.

그들은 대부분이 크게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었고, 심지어 어떤 자는 사형 선고 받을 위험까지 놓여 있었다. 그들의 보통 농간과 술책과 위증으로는 이 타격을 막을 수 없으므로 공포가 너무나 컸었는데, 마침 암행어사들이 도내를 두루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암행어사 하나를 찾아내 그 뒤를 밟고 그 행동을 감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이내 한 음모를 꾸몄다.

영리하고 대담한 불한당들이 어사로 가장해 고을들을 쑥대밭이 되도록 금품을 강탈하는 일이 드물지 않으므로, 어사가 이런 무리 중의 하나라는 것을 수령(首領)에게 설득시켜 그를 체포할 허락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임금의 사자(使者)를 포박하는 자들은 거의 틀림 없이 사형이겠지만, 그 대신 수령도 파직당하게 만들 수 있다. 어사 같은 고관을 공식으로 체포하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무질서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다.

수령만 날리면 아전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게 없어진다. 아전 전체를 위해 희생될 사람들의 이름을 제비 뽑아, 바로 그날 밤 수령에게 청원을 냈다. 처음엔 청원 수령(受領)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전들은 그런 사기꾼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원님이 무서운 책임을 지게 될 우려가 있다, 자기들 역시 목숨이 걸린 이런 청원을 결코 함부로 하지 않는다며 며칠을 설득해 끝내 체포 영장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제비로 뽑힌 아전들은 그 문서를 지니고 그날 저녁으로 어사가 투숙한 곳에 가 달려들어 그를 죄인처럼 묶었다. 어사는 자기의 이름·관직을 밝히고 옥새 찍힌 증명서를 보이며 신호를 하니 그의 보좌관·사령들이 모여들었다. 아전들은 대경실색한 체하며 어떤 놈들은 달아나고 어떤 놈들은 어사의 발 아래 엎드려, 방금 모르고 저지른 무서운 죄를 갚기 위해 죽여 주십사 빌었다.

어사는 노발대발 그들을 몹시 때리라고 부하들에게 맡겨 둔 채 수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곧장 군청으로 가 수령을 파면 축출했다. 아전 가운데 죽은 자는 없었다고 한다. 여럿 불구가 되고 어떤 자들은 유형을 당했으나 수령 축출이라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새 수령은 전임자의 예에 놀라, 정의를 위한 그의 열성을 본 받는 것을 삼갔다.”

중앙 조정이나 지방 관아나 부정과 부패의 늪에 빠져 있었다. “정직한 관리란 조선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여운 삶을 산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세금을 내야 할 뿐 아니라 관리·밀수꾼·경찰·군인, 여기에 매년 겨울과 봄이 되면 출몰하는 도적떼에게 돈을 바쳐야 한다. 조선 사람들이 소위 게으르다고 하지만 이는 사유재산권이 불안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포자기 현상에 불과하다. 소수의 부자 상인들과 지방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며 서양 사람들이 볼때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의 수준으로 하루살이 인생(hand-to-mouth existence)을 살고 있다.”

조선의 초가집. 구한말까지 일반 백성의 보편적 주거환경이었다.

의복과 주거환경

개신교 선교사들이 목격한 19세기 말 조선 백성의 삶은 처참했다.

"그들의 옷은 현지의 하얀 천으로 된 짧고 헐렁한 웃도리와 길고 통이 큰 바지가 다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한 달에 두 번 옷을 갈아 입을 수 있었다. 조선 포목이 그렇게도 투박한 것은 공장(工匠: 전문직 장인)이 적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두가 공장이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여자들은 실을 잣고 베를 짜고 옷을 만든다. 따라서 아무도 늘 이 일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익숙해지는 사람도 없다. 모든 기술에 있어서 거의 그렇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모든 것에서 매우 낙후돼 있다. 온갖 기술과 수공업이 노아의 홍수 직후에 비해 진보된 게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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