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⑨ 교육과 복음(2)
조선 여성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여학교들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한국 최초의 고아원 설립해 거리 고아들 데려와 가르친 언더우드
1000개 교회‧300개 학교 세우고 수백명 목사 배출한 사무엘 모펫
임시정부 부주석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도 선교사가 키운 고아
민족 지도자로 우뚝 섰던 도산 안창호 선생도 기독교 학교 출신
미션스쿨 ‘교육대혁명’,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도 밑바탕 돼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후배 선교사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1984년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상동(현 남대문 지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민간병원인 정동병원(시병원)을 세운 윌리엄 스크랜턴은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울의 중심에 있던 병원을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상동으로 옮긴다.
이때 메리 스크랜턴도 함께 거처를 옮겨 아들을 도와 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시장 바닥의 여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때까지도 조선시대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여성들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그래서 메리 스크랜턴이 생각해 낸 것이 ‘전도부인’ 제도였다.
전도부인 제도는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교훈시켜 앞장세웠던 제도였다. 성경교육을 마친 여성(전도부인)들이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안방의 부녀자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메리 스크랜턴이 1898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총 8명의 전도부인들이 그녀와 함께 동역하고 있었다. 전도부인들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상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이화학당을 돌보며 유교적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 살던 여성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여성 교육을 향한 열정이 이화학당 설립 및 운영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상동교회 내 공옥여학교, 시흥의 무지리여학교, 이천이 여자매일학교(현 이천양정여자고등학교), 수원의 삼일소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등을 설립했다.
또한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 및 숙명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의 설립을 돕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선 여성들을 일깨우고 교육하는데 진력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상동교회(현재 남대문시장 내 위치)를 비롯해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등 서울의 주요 감리교 교회를 설립했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선교활동과 여성교육을 위해 살다가 1909년 10월8일, 7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한국 여성 교육의 개척자이자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메리 스크랜턴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고, 그녀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하나님 음성 듣고 조선 오게 된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남성들을 위한 배재학당을 세우고, 메리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설립해 조선 여성 교육에 힘쓰고자 할 때, 길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보고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이가 있었다. 그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한국이름 원두우) 선교사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다. 1881년 뉴욕대를 졸업하고 뉴버런스웍(New Brunswick)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84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됐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지 한달 만에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85년 1월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약 2개월 간 조선어 공부를 한 후, 1885년 4월 5일 장로교 소속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는다.
그가 조선에 오게 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원래 언더우드는 어렸을 때,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그때부터 인도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어느 날, 1882년에 체결한 조약에 의해 문호가 개방된 ‘은둔의 나라’ 조선에 1200만~1300만 명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문호가 개방된 지 1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교회가 선교를 위해 아무런 준비 활동도 하지 않고 있음에 격동한 언더우드는 직접 조선에 갈 선교사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에 들어가기는 너무 이르다’는 인식이 퍼져있던 때라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았고,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도 없었다. 그때, 언더우드의 가슴속에서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라는 메시지가 울려 펴졌다.
그러나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고한 소명감을 품고서 인도가 필요로 하는 의학 공부를 하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울림을 애써 외면한다. 때마침 뉴욕의 개혁교회로부터 의학 공부에 지장이 없는 조건으로 목사직 초청을 받았는데, 언더우드가 이를 수락하는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려는 순간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결국 ‘은둔의 나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해 조선 땅을 밟은 언더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근무하면서, 제중원 내 의학교 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제중원에서 교육과 선교 활동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1886년 5월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 학당을 설립하고 거리의 고아들을 데려다가 돌보며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듬해 9월에는 자택의 사랑방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다. 그후 고아원은 새문안교회에서 운영했으며, 초기에는 언더우드 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5년 현재의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로 바뀌게 됐다. 이어 1915년 4월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경신학교 대학부가 설립됐는데 이 대학부를 모체로 2년 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된다.
◇언더우드가 극진히 간호해 살려낸 네 살 아이가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다
언더우드 학당에서도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됐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와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어느 날 남자 하나가 네 살배기 아이를 고아원에 데리고 왔다. 관직에 있던 아이의 부친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귀향을 갔고, 모친은 사망해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너무 어려서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던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매우 아픈데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신의 몸 상태가 매우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강원도 홍천까지 그 아이를 찾아간다.
당시 아이는 너무 굶주린 나머지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했다. 이대로 두면 곧 죽을 것이라고 직감한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극진히 간호해 살려낸다. 이후 아이는 언더우드 학당에서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으며 훌륭하게 성장했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영어를 익히는 등 어릴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 이 아이가 바로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을 마친 후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서 근무하다가 1896년에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04년에 귀국한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비서로 일하며 새문안교회와 YMCA를 중심으로 선교와 교육 활동에 힘쓰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김규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했으며,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주석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오늘날 김규식은 김구, 여운형, 이승만, 신채호, 안창호, 조만식 등과 함께 한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언더우드의 사랑으로 그의 생애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창호 선생 등 국민들 일깨우는 정신적 지도자들 키워냈던 언더우드 학당
김규식 뿐만아 아니라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해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한 후 민족의 지도자이자 겨레의 스승으로 우뚝 선 인재가 있었다.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안창호는 1895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이 각국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신학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곧 상경해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한다. 신학문을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서당에서 한문만 익혀오던 안창호에게 거기서 접한 세계사, 과학, 산수, 지리 등 교과 과목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구세학당에서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배운다. 즉, 편협한 민족주의는 집단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아 전쟁을 야기하는 반면,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한 민족주의는 모든 민족을 섬기기 위해 자민족의 자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인류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이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안창호는 1897년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당시 독립협회는 서민과 학생들을 포함한 각계각층 사람들을 모아 ‘만민 공동회’라는 대중 집회를 열었는데, 안창호도 이 집회에 참여해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민족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안창호의 위대함은 늘 그의 신념을 삶 속에서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는 1899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에 최초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설립한다. 그리고 자신도 더 많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교포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해 힘쓰면서 한인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해 전덕기 목사, 이승만, 김구, 이회영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고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선다.
이승만이 외교활동에 중점을 둔 독립운동을 강조하고, 김구 등은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을 때, 안창호는 보다 긴 안목에서 국민들을 교육하고 계몽함으로써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城學校)를 설립하고, 민족 계몽을 위한 활발한 교육 활동을 전개한다. ‘대성(大城)’이라는 학교명처럼 크게 성공할 인물들을 양성해 민족 독립을 위한 중심세력을오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안창호 사상의 핵심은 교육을 통해 민족 혁신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민족 혁신은 자아 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자아 혁신은 바로 인격 혁신이라는 것이었다. 즉, 각자가 인격 혁신을 이루면 이것이 곧 민족 혁신으로 이어져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 바탕에는 기독교 사상이 깔려 있었다. 아울러 안창호는 자신의 신념을 평생 몸소 실천했으며, 그의 삶 자체가 교훈이었기에 겨레의 스승으로 일컬어진다.
이처럼 언더우드 학당에서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국민들을 일깨우는 정신적인 지도자들로 키워졌다.
◇선교사들, 서울‧평양‧원산‧개성‧공주‧대구‧목포‧부산 등에 미션스쿨 세워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경우에서 보듯, 청일전쟁 직후 한반도 전역에 신교육에 대한 향학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일본에 패했다는 사실은 몇백 년 동안 중국과 종속관계를 맺어왔던 조선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계관의 대변혁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이 될 때까지 기독교 신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신교육을 가르치는 미션스쿨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선교사들은 1905년 을사조약 전후까지 서울, 평양, 원산, 개성, 공주, 대구, 목포, 부산 등지에 기독교 학교를 세웠으며, 이러한 조선의 근대교육은 주로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에 의해 주도됐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비롯해 서울의 공옥학교(1896)와 배화학교(1898),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공주의 영명학교(1905), 평양의 광성학교(1894), 맹아학교(1894), 정진학교(1896) 등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였다. 장로교는 경신학교를 시작으로 평양에 숭덕학교(1894), 숭실학교(1897), 평양신학교(1901), 숭의학교(1903)를 세우고, 부산에 일신여학교(1895), 목포에 정명학교(1898), 원산에 진성여학교(1904), 대구에 계성학교(1906) 등을 세웠다.
국권피탈 직전인 1910년 초반까지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 미션스쿨 수는 비록 통계마다 차이는 있으나, 천주교와 개신교 계열의 학교를 모두 합쳐 대략 800-950여 개 정도 존재했으며, 그중 500-600여 개가 장로교 계통이고, 150-200여 개가 김리교 계통의 학교였다. 이처럼 구한말 미션스쿨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폭발적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과 미국 선교본부의 지원이 맞아떨어지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헐버트 선교사는 기독교 계통이 학교들이 크게 늘어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인들은 기질 면에서 보면 기독교의 접근에 대하여는 특히 호의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도 동시에 가장 신비주의적인 기독교가 한국인과 접촉하면서 합리성이나 이상주의적인 면에서 매우 친근함을 발견한다는 데에 한인들의 그와 같은 특수한 감성을 엿볼 수가 있다. ...(중략)... 이와 같은 이론이 옳건 그르건 간에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의 감화는 한인들에 의해 쉽사리 수용되었으며, 10년 동안에 교회와 교회 계통의 학교가 전국의 방방곡곡에 점찍은 듯이 세워졌다.”
즉, 교회가 들어서는 곳마다 미션스쿨도 함께 세워졌던 것을 알수 있는데, 미션스쿨이 늘어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조선 교육 시스템의 병폐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교육 시스템의 특징을 짧게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로 일부 특정한 계층(양반)만을 위한 교육이었고, 둘째로 교육의 내용이 오직 입신양명을 위한 유학 위주였으며, 셋째로 여성과 천민들은 교육의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은 특정 계층뿐만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백성들조차도 교육받을 권리를 가졌고,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동일하게 교육의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교과 과정을 통해 다방면의 인재를 양성하는 합리성을 추구했다. 이런 특징들이 잘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미션스쿨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 미션스쿨이 추구하는 교육의 이념 및 운영 방식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열린 개방성과 보편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며, 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교육 대혁명의 파도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면서 자유, 정의, 평등, 평화, 민주 정신도 함께 퍼지게 되었고, 이러한 정신들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도 밑바탕이 됐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우리나라가 신생 독립국 중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로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됐다.
◇26세에 들어와 조선의 복음화‧독립 위해 일생 바친 ‘마포삼열’ 선교사
자신의 나라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미국 출신의 사무엘 모펫(Samuel A. Maffett, 1864-1939) 선교사는 1901년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해 근대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1890년부터 1936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며 1000개의 교회와 300개의 학교를 세우고 수백 명의 목사를 배출했다. 사무엘 모펫 선교사는 한국 이름 ‘마포삼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 출생으로 1884년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느끼면서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낸 매코믹 대학에 1885년에 입학한다.
그가 선교를 위해 한국 땅으로 건너올 당시 조선은 각종 질병이 난무하고 외국인에 대한 배척 또한 심한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을 최초의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의 거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 등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종기나 무좀 같은 피부병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을 알고도 모펫 선교사는 조선 선교를 결심했다. 그리고 선교사로 임명받은 뒤 모펫은 1890년 1월 인천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후 그는 조선을 ‘사명의 땅’으로 생각해 모든 일생을 바쳤다.
모펫 선교사는 1893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또한 1918년-1928년까지 10년 동안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했고, 평양에서 현 숭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숭의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모펫 선교사는 매큔(George S. McCune, 1872-1941), 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사건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며,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찾아와 오직 조선민족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던 사무엘 모펫 선교사는 1934년, 70세의 나이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로부터 은퇴하고도 계속 조선에 머물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싸우다가 1936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조선 땅에 묻히기를 바랐던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1939년 10월 24일 75세의 일기로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생전에 “나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한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그의 유골은 이 땅을 떠난 지 67년 만인 2006년에 다시 한국 땅에 들어와, 유가족들이 지켜보난 가운데 자신이 설립한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앞 교정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