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꽃은 벚꽃이요, 사람은 사무라이’, 절정의 순간 스러져 사라지길 원했던 마지막 사무라이가 81세 나이로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너무 완벽한 정보활동으로 오히려 인생을 망쳐버린 스파이, 요시카와 다케오(吉川猛夫)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이 진주만 기지를 기습했다. 미국 전함 7척이 격침되고, 11척이 파손되었다. 비행기는 188대가 격추되고 159대가 파손되었다. 2,400명 이상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1,178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군사적 재난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비행기 29대와 소형 잠수함 5척이 실종되었고 사망자도 64명에 불과했다.

일본의 완벽한 공습 뒤에는 하와이 일본 총영사관 부영사 모리무라 타다시(森村正)가 있었다. 모리무라는 1941년 3월 부임 이후 진주만 모든 함정들의 출입 상황, 접안 위치, 히컴(Hickam) 비행장 항공기 배치 상황들을 세세하게 도쿄에 보고했다. 기습 하루 전날은 공습에 결정적 장애물인 공습 방해용 대형 풍선이나 항공모함이 없다는 사실까지 알렸다.

모리무라는 1933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요시카와 다케오였다. 외교관으로 위장하면서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렵도록 ‘모리무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머리도 길렀다. 총영사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드라이브와 보트를 즐기고 밤이면 요정에서 살았다. 야외로 나갈 때도 쌍안경이나 카메라는 휴대하지 않았고, 메모나 스케치도 하지 않았다. 오직 머리로만 기억하고, 전화에선 의심받을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직전 도쿄 지시로 영사관의 모든 서류는 소각했다. 모리무라를 유력인사 아들로 놀기 좋아하는 한량(閑良)쯤으로 평가했던 FBI는, 5개월 억류기간 중에도 요시카와의 간첩 증거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1942년 8월 미국에서 추방된 요시카와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훈장도 환영행사도 감사편지 한 장도 없었다. ‘영웅의 귀환’ 치곤 너무 쓸쓸했다. 친정인 해군 정보부대로 복귀한 요시카와는 이듬해 결혼을 하고, 내근활동을 하다 1945년 8월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지만 패전국 스파이에겐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인에게 진주만 공습은 치욕이고 악몽이었다. 전범(戰犯)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웠던 요시카와는 다시 이름을 바꾸고 시골로 숨어들었다. 불교 승려 행세를 하며 이리저리 떠돌던 요시카와는 1952년 미군의 일본 군정이 끝나서야 겨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53년 우연찮게 에히메(愛媛)신문에 요시카와의 스파이 활동이 보도되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200만 명 이상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에 그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시카와가 시작한 사탕 사업은 얼마 못가 실패했다. 살길이 막막했던 요시카와는 연금을 신청했지만 정부는 "일본은 미국에 스파이 활동을 한 사실이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요시카와는 이제 사업을 할 수도,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늙은 아내가 보험을 팔아 번 돈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파이 중 한 사람이었던 요시카와는 평생 그렇게 실업자로 불명예스럽게 살다 갔다.

막(幕)이 내렸다. 관객이 모두 돌아간 텅 빈 무대, 군국주의 시대 자기 역할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한 스파이가 자조적 독백을 한다. "나는 사무라이로서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인데… 사회는 나를 버렸고, 국가는 나를 배신했다. 오직 내 아내 한 사람만 나를 존경해 주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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