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의 독백-사소단장(娑蘇斷章)
꽃밭의 독백-사소단장(娑蘇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1915~2000)
☞언뜻 가독성(可讀性)이 떨어지는 시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소단장(娑蘇斷章)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신라건국 설화를 모티브로 한 시다. 사소(娑蘇)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경주 부근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였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소는 오랫동안 수행(修行)에 들었지만 하늘의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라는 표현은 다른 분야보다 예술이 뜻한 바를 성취하기에 알맞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온 노래’ ‘바닷가에 가 멎어버린 말’ ‘잃어버린 입맛’은 답답한 현실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꽃은 ‘아침마다 개벽(開闢)하고’ 나는 그 문(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권태가 없는 미지의 신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헤엄 칠 줄 모르는 아이가 물가에서 망설이듯 그 안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벼락과 해일(海溢)만의 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비록 심신이 굳지 못하고 용기도 부족하지만 이렇게 호기롭게 외친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전염병 시대의 삶은 너나 할 것 없이 핍진하다. 바닥인가 싶으면 지하실로 떨어진다. 힘내세요, 하는 위로의 말이 저어되고 또 어설프다. 이런 때 사소처럼 인적 없는 곳으로 가, 시정거리(視程距離) 제로의 세상을 향해 켜켜이 쌓인 마음의 응어리를 뱉어내는 것도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