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 Art’, 투기 대상인가 새로운 문화현상인가
미술품 재테크에 이어 ‘NFT Art’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NFT Art’는 문자 그대로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한 토큰에 예술을 더한 개념으로, 디지털 미술작품을 대체 불가능한 토큰처럼 만들어 거래한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로 예술작품을 디지털화 하고 여기에 다시 고유인식 값의 부여, 즉 디지털 낙관을 찍어 소유권을 확보한다. 이를테면 새로 창작되는 미디어아트는 물론 화가들의 신작,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리움미술관의 ‘고목과 여인’ 같은 역사적 명작들도 거래될 수 있다.
올해 상반기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Beeple)의 작품이 6930만 달러(약 782억4000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옅어지는 메타버스 시대가 오면 ‘NFT Art’시장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될 게 자명하다. 그런데 예술작품은 소장(所藏)의 목적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이 될 때 시장은 왜곡된다.
업계는 ‘NFT Art’를 하나로 뭉뚱그려 다루지만 엄격히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보아야하고 또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새로 창작되는 미디어아트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미술작품 NFT이다. 새로 창작되는 디지털미디어아트 NFT는 환영할만하다. 미디어아트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창작되는 콘텐츠이므로 취약한 저작권 보호를 강화하는 한편 시장의 거래를 용이하게 한다. 반대로 기성 미술가의 작품이나 역사적 명작의 NFT는 순기능보다 역기능, 즉 투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크다.
한 세기 전, 독일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무한히 복제되는 예술작품과 그에 따른 문화현상을 예견했다. 과학기술 발전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진본이 복제의 ‘시뮬라르크(simulacre)’ 속으로 퇴행하고, 이런 현상은 진본에만 있는 고고한 숨결, 곧 아우라(Aura)의 붕괴를 가져온다. 벤야민은 이러한 문화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대중은 보다 용이하게 예술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이는 곧 대중이 문화의 수동적 수용자 지위에서 능동적 수용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문제는 기성 화가들의 작품들을 비롯해 다빈치의 ‘모나리자’, 박수근의 ‘고목과 여인’ NFT 거래를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볼 수 있는가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문화현상이 아니다. ‘NFT Art’ 시장 관계자들은 그게 비록 복제본이긴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로 희소성을 확보했으므로 진본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희소성은 값을 높일 순 있을지언정 아우라(Aura)를 만들지 못한다.
마르셀 뒤상(Marcel Duchamp)이 1917년 ‘앙데팡당전(salon des independants)’에서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한 지 104년이 지났다. 뒤상은 관객들을 향해 변기의 우아한 곡선을 주목해 달라면서,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품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예술은 발견하는 자의 몫이고 말했다. 팝 아티스트(Pop Artist)들은 ‘대중적인 것이야말로 예술이다’ 는 기치를 내걸고 예술의 전복(顚覆)을 시도했다. 그들은 코카콜라, 통조림깡통, 만화 속 주인공 등 일상의 흔한 소재를 미술에 끌어들였다. 그것은 미술시장을 위한 게 아니라 예술엄숙주의에 빠진 대중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디지털미디어아트를 제외한 기존 미술 NFT는 봉이 김선달 같은 장사치와 과학기술의 합작품이다. 다빈치와 박수근의 NFT가 아우라(Aura)를 가진 유일무이한 진본과 그 값이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될 날이 올지 모른다. ‘NFT Art’는 첨단과학시대의 기형적 예술현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