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선 한센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다
[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④ 나환자와 복음 가족·공동체로부터 퇴출 당했던 ‘천형(天刑)’ 나병, 1910년 약 2만명 부모 이어 한국 나병환자들 섬기기 위해 돌아온 맥켄지 선교사 가족 美선교사가 길가 버려진 나환자 극진히 치료했던게 애양원으로 발전 같은 민족도 감염될까봐 돌맹이 던지던 나환자들을 자식처럼 대해줘 현대식 병원 시설 갖추고 미국 등지에서 새로운 치료법 배워서 도입 하나님이 파란눈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베푼 거룩한 사랑과 희생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한센병’, 말초신경이 점점 파괴돼 감각을 잃고, 손과 발, 얼굴이 짓뭉개지는 병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살이 썩어 문드러진다고 해서 ‘문둥병’이라고 불렀고, 이 병에 걸린 사람을 얕잡아 일컬어 ‘문둥이’라고 했다. 한센병은 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문둥병(leprosy), 문둥이(leper)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으로 문둥이였던 시몬도,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모두 문둥이로 예루살렘 근방의 베다니 마을에 살았다. 이 때문에 베다니를 당시의 나환자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근현대에 와서는 ‘나병’이라고도 불렀던 한센병은 1873년 노르웨이 의사 한센(Gerhard A. Hansen, 1841-1912)이 나균을 발견하면서 한센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병은 흔히 주로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습한 열대 기후에 속한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환자수가 약 2백만명 쯤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환자들을 포함하면 실제 감염자 수는 천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가족·공동체로부터 퇴출 당했던 ‘천형(天刑)’ 나병, 1910년 약 2만명
한센병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천포창’ 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서 ‘나병’이란 병명이 붙었다. 나환자는 정부에서 도별로 엄한 격리 조치를 실시했다. 사람들에게 전염된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했고, 사람 이하 취급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나환자가 생기면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거나 사람의 장기를 먹이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야만 낫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 하늘의 형벌)을 의미했고, 그것은 곧 가족 및 지역 공동체로부터의 격리 혹은 퇴출을 의미했다.
1910년 한국에 한센병 환자는 약 2만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1980년도엔 2만7964명, 1990년도엔 2만3833명이었다가 2017년의 경우 활동성 환자를 포함한 관리 대상은 1만33명으로 줄어든다. 보건 당국은 활동성 환자의 경우 향후 5년 후에, 관리 대상자는 향후 20년 후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센병 치료를 위한 현대식 병원이 도입되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어서야 이 땅에 한센병이 완전히 사라질 상황을 맞이했다.
◇부모 이어 한국 나병 환자들 치료하고 섬기기 위해 돌아온 맥켄지 선교사 가족
공포의 대상이자 미신적 주술의 대상이던 나환자들을 위해 최초로 조선에 서구식 나병원이 도입된 건 1900년 초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당시 나병원 밀집 지역은 주로 영남과 호남 이었는데,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들의 의료사역도 부산, 대구, 광주에 집중됐다.
부산에서는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인 찰스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5)이 1910년에 영국 구라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나병원을 설립했다. 1912년에 선교사인 제임스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가 이곳 나환자병원 원장으로 취임해 병원 이름을 상애원으로 명명하고 은퇴할 때까지 27년간 나환자들을 볼봤다.
1910년 2월에 한국에 들어온 맥켄지 선교사는 간호사였던 부인 메리 켈리(Mary Kelly, 1880-1964)와 함께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나환자 돌봄과 목회 사역을 헌신적으로 펼쳤다.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사역은 처음에는 20명으로 시작했으나, 나병원 설립년부터 1928년까지 18년 동안 무려 4260명의 나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맥켄지 부부는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한편, 다양한 치료법을 연구 개발해 나환자 사망률을 25%에서 2%로 감소시켰다.
맥켄지 부부의 두 딸인 헬렌 맥켄지(Helen P. Mackenzie, 1913~2009, 한국명 매혜란)와 캐서린 맥켄지(Catherine Mackenzie, 1915~2005, 한국명 매혜영)는 부산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고등학교를 거쳐 호주에서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가 간호사가 되어 부모를 이어 한국 사람들을 치료하고 섬기기 위해 돌아온다. 맥켄지 선교사 가족은 1938년 2월 18일 일제에 의해 쫓겨났지만, 두 딸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좌천동에 일신기독병원이 전신인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하고, 은퇴할 때까지 일평생을 한국에서 헌신한다.
맥켄지 가족이 설립해 운영하던 일신기독병원 홈페이지에는 지금도 설립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본을 따라 그 정신으로 운영하며, 불우한 환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체적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의 정신을 구현한다.”
여수 애양원과 부산 상애원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나병원은 대구의 애락원이다. 대구 애락원은 1913년 3월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아치볼드 그레이 플레처(Archibald Gray Fletcher, 1882-1970)가 초가집을 구입해 환자 20여 명을 수용하면서 출발한다.
1882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플레처 선교사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을 공부한 뒤 27세의 나이로 조선으로 와서 평북 선천에서 활동한 의료 선교사다. 그는 1910년 대구 제중병원 원장으로 부임했지만, 대구 거리에 나환자들이 많은 걸 보고 그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도 많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했지만 해방 후 다시 귀국해 나환자를 대상으로 한 사역을 이어갔다.
대구 애락원은 1949년에만 1750명의 환자를 수용했을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플레처 선교사는 경북 지역에 200개 정도의 교회를 세울 정도로 복음 전파에도 전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美 선교사가 길가 버려진 나환자 극진히 치료했던게 오늘날 애양원의 시작
영호남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나환자 병원은 여수 애양원이라 할 수 있다. 감동적인 일화도 많이 가지고 있는 애양원은 1909년 광주에서 처음 시작됐다. 미국 선교사가 우연히 길가에 버려진 여성 나환자를 발견해 극진히 치료했던 게 오늘날의 애양원으로 발전했다고 전해진다.당시 광주 제중병원장이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로버트 윌슨(Robert M. Wilson, 1880-1963)이 광주 나병원을 설립했는데, 설립 배경에는 윌슨 외에도 오웬, 포사이드 등 두명의 선교사가 더 관련돼 있다.
우리슨 선교사는 1905년 5월 워싱턴 대학 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의대 재학 시절 중국 난징 신학교 교수이자 나중에 옌칭 대학 초대 총장과 주중 대사를 역임한 존 레이튼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로부터 “한번도 의사를 만나본 적이 없는 수백만의 중국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연설을 듣고 중국 의료선교에 자원한다.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던 그가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된 건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선교사 때문이었다. 광주 제주병원 소속이던 오웬 선교사가 남장로회 선교본부에 의사 충원을 요청해 윌슨의 선교지가 바뀌게 된 것이다.
오웬 선교사는 1867년 7월 미국 버지니아주 출생으로 햄튼 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 VA)을 졸업한 뒤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스코틀랜드 유학을 떠났다. 해외 선교지에서는 무엇보다 의술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그는 1896년 버지니아에서 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898년 11월5일 미국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온다. 이듬해인 1899년 전남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인 목포진료소를 개설한 그는 나중에는 의료 사역보다는 복음전도 사역에 집중한다. 목포를 비롯해 광주, 나주에 선교부를 세웠는데, 특히 순천 지역에만 40여 개 교회를 세웠다.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1873-1918) 선교사는 1873년 12월25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의과대학 재학 시절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고 졸업 후 쿠바 군의관을 거쳐 1904년 8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전주 선교부 소속으로 전주예수병원 의사로 사역하던 그는 한 마을에서 무장괴한에게 습격당한 사람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밤늦게까지 환자를 치료하고 그 집에 머물던 중 포사이드 선교사 역시 무장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두개골이 깨지고 온몸에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되었다. 급히 군산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가 깊어져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회복한 포사이드 선교사는 이듬해인 1907년 다시 목표 선교부로 부임한다.
그렇게 사역을 해나가던 1909년 4월, 광주의 윌슨 선교사로부터 급한 전갈이 온다. 오웬 선교사가 열병으로 위독하니 급히 와서 치료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목표에서 광주까지는 100km, 당시 조랑말을 타고 들과 산을 넘어 급히 달려가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목적지를 20km 앞두고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여자 환자였는데 머리카락은 온통 떡져 있고, 냄세는 코를 찔렀다. 거기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퉁퉁 부은채 문드러져 있어 한 눈에 나환자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동료 선교사가 위독하긴 하지만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나환자를 이대로 버리고 갈 순 없었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말을 끌며 겨우 광주까지 도착한다. 하지만 위독한 상태에 있던 오웬 선교사는 이미 자택에서 숨을 거둔 뒤였다. 한시라도 시급한 상황에 포사이드 선교사를 애타게 기다리던 오웬 선교사의 부인 등 동료 선교사들이 웬 누더기 차림의 여자를 말에 태운 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던 포사이드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어떤 심경이었을까. 오웬 선교사의 부인은 당시 목격담을 1909년 8월 ‘The Missionary’ 지에 다음고 같이 기고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수개월, 아니 몇 년은 빗지 않은 듯했다. 옷은 넝마 조각처럼 더러웠고, 손과 발은 퉁퉁 부어 있었고, 상처투성이였다.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발 한쪽엔 짚신이, 다른 발에는 두꺼운 종잇조각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다”
당시 오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나환자 여인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나병을 앓아 왔고, 수년 전 남편마저 죽는 바람에 물전걸식으로 연명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동료 선교사들의 냉담한 눈초리를 의식한 포사이드는 고심 끝에 광주의 벽돌 굽던 가마를 생각해 냈고, 나환자를 그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쓰던 옷가지와 침구류를 갖다 준 후 날마다 그녀를 돌보며 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런 포사이드 선교사의 행실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게 한다. 지체의 높낮음을 떠나 조선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뿐더러 행여 병이라도 옮길까 싶어 멀리하고 기피하던 나환자를 지나가던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가 치료하고 돌봐 준 것이다. 이것이 결국 광주 한센병원, 오늘날 여수 애양원을 꽃피운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같은 민족도 감염될까봐 돌맹이 던지고 멸시하던 나환자를 자식처럼 대해 주다
당시 나환자는 누구에게나 기피 대상이었다. 그런데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서양인 선교사가 고름투성이인 나환자의 팔을 붙잡고 부축하는 모습을 본 광주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 중엔 나환자들만 보면 돌로 쫓아버리곤 했던 최흥종(崔興琮, 1880-1966)이란 사람도 있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부축하는 사이, 떨어뜨린 나환자의 지팡이를 마침 옆에 있던 최흥종에게 집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최흥종은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포사이드 선교사가 그 지팡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어 들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일생 동안 신앙의 나침반이 되었다. 같은 민족이었던 사람들도 혹시라도 자기가 감염될까봐 돌맹이를 던지고 멸시하던 나환자를 마치 자식처럼 대해 주는 것을 보고 “저것이 바로 예수교의 힘, 바로 예수의 사랑이다. 예수를 믿으러면 저 의사분처럼 믿어야 될 것이야”라는 경외감을 갖게 됐다.
이렇게 포사이드 선교사와의 만남은 평생 그를 가난하고 평든 자를 위해 한평생 헌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최흥종은 1932년 김병로, 송진우,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 나환자 근절협회’를 창설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이 조직의 목적은 조선인 나환자 전원을 수용하는 시설을 짓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조선의 나환자들에게 밎진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광주 지역에서 ‘나환자들의 대부’로 통하고 있다.
포사이드는 ‘조선의 버림받은 나환자를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 채 목포로 돌아갔다. 이제 나환자 사역은 윌슨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광주에서 윌슨이 나환자를 치료한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많은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들었고, 이제 조그만 수용소에 몰려드는 환자를 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리하여 1912년 광주 봉선리에 병원 건물을 짓게 된다. 이때부터 나환자들 사이에서는 이 나병원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말끔한 현대식 건물과 치료 도구를 갖춘 데가 인격적인 의사들이 진료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환자들은 나병원에 수용되는 걸 굉장한 특혜로 여겼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 환자들이 거리를 배회하자 주민들의 민원이 쇄도한다. 그래서 지금의 애양원 자리엔 여수 신풍반도로 이전했다. 이후 ‘사랑으로 양을 키우는 동산’이란 뜻의 애양원이랑 명칭은 1935년부터 사용하게 됐다.
비슷한 시기인 1916년, 일제의 조선총독부도 전남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립해 나환자의 치료에 나선다. 하지만 운영 방식은 애양권과 사뭇 달랐다. ‘엄격한 격리’와 ‘엄격한 운영’이 특징이었다. 폭력 등 비인격적인 처사가 만연했다. 반면 애양원은 환자의 자발적 퇴원, 일시적 귀가나 외출을 허용했다. 그리고 애양원교회를 통한 자치도 인정했다. 이 때문에 여수, 순천에는 애양원 입소를 기다리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나환자들이 많았다.
애양원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제임스 켈리 웅거(James Kelly Unger) 선교사, 김응규 목사에 이어 1939년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애양원의 역사에서 손양원 목사의 행적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원래 애양원 원장은 목사만이 맡을 수 있었지만 “손양원 전도사가 비록 정식 목사는 아니지만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진정한 목사이며 애양원에 속한 영혼들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적극 권유한 웅거 선교사의 요청에 따라 부임할 수 있었다. 손 목사는 1938년 평야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 임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손 목사가 원장에 부임하기 직전에 애양원에서는 큰 사건 하나가 터졌다. 당시 증세가 심한 환자를 격리해 놓은 시설에 들어갈 때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간호사들조차도 병이 옳을까봐 신문지를 깔고 출입했다. 그런데 이런 행동에 큰 모욕감을 느낀 환자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라며 간호사 한 명을 때려 죽인 것이다. 그만큼 애양원에서조차 환자와 정상인 사이의 벽은 높고 두터웠다.
그런데 손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애양원의 중증환시설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가 잠깐 기도를 올리고는 직접 입으로 그 환자의 고름을 빨아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양원에서는 “틀림없이 손 목사도 한센병에 감염됐을 것”이라며 감염 검사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양성이 아닌 음성이었다. ‘검사가 잘못됐다’며 연거푸 몇 차례 더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손 목사는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 텐데...”라며 크게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식 병원 건물·시설 갖추고, 미국·인도 등지에서 새로운 치료법 배워서 도입
이후 애양원은 손양원 목사의 철저한 신앙지도와 생활지도에 따라 굳건한 신앙생활 공동체로 발전해 간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손 목사의 순교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동안 방치되다 1959년 10월1일 미국인 스탠리 토플(Stanly C. Topple)이 손 목사를 이어 애양원 제10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새롭게 탈바꿈한다.
에모리 대학교 의과학대 출신인 토플 선교사는 졸업 무렵 한국 애양원에 의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27세의 나이에 한국 땅을 밟고 헌신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전후 복구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참혹한 상황이었다. 애양원엔 의료시설은 물론 수도, 전기시설 조차 갖춰지지 않았었다. 환자 치료나 수술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 토플 선교사에 따르면 당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수술을 해야했다고 한다.
환자들의 처지도 말이 아니었다. 나환자들은 한센병 이외에도 각종 정신질환에 안질 등을 심하게 앓고 있어 약물 남용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토플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환자 치료에 땀을 쏟았을 뿐 아니라 미국의 후원을 이끌어내 현대식 병원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미국과 인도 등지에서 새로운 치료법을 배워서 도입했다.
또한 일반 피부과 진료를 병행해 일반인과 나환자 사이의 벽을 허무는 데도 힘을 쏟았고, 소아마비 수술도 도입해 전국에서 소아마비 환자들이 애양원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토플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방, 전기, 수도시설이 모두 열악했지만, 함께 지내던 환자들과 의료 봉사자들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견딜 수 있었어요. 사랑과 감사를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지요. 지금도 그 때를 회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한편, 한센병 완치를 위해서는 신앙과 치료 뿐 아니라 재활이 반드시 필요했다. 장기간 격리 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플 선교사는 한센인들을 위해 양장, 봉재 등을 가르쳤으며 농사나 가축을 기르는 일 등을 할 수 있도록 땅도 나눠줬다. 당시 한센병에서 완치된 환자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토플 선교사의 한국 이름인 ‘도성래’를 따서 마을 이름을 ‘도성마을’이라고 붙였다. 지금도 한센인들은 도성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토플 선교사는 애양원 환자들이 전부 완치되자, “이제 한국인이 애양원을 맡아야 한다”며 1982년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수많은 애양원 출신 나환자들은 그를 아직까지 손양원 목사에 버금가는 ‘한센인의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
한센병은 천형(天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돼야 했고, 가족들조차도 외면했기에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뭉뚱그려진 손을 잡아주고, 가족과 친구가 되어주고, 치료해주는 일은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사랑과 희생’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파란눈의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베푼 거룩한 사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