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순재, 이제 '천상의 무대'로...영원히 떠난 '영원한 현역'
25일 새벽 건강 악화로 끝내 별세...향년 91세 약 70년간 다양한 장르에서 연기 열정 불태워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약했던 ‘국민 배우’ 이순재가 별세한 가운데 각계각층에서 추모 물결이 잇따랐다.
25일 문화계에 따르면 건강 악화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순재가 이날 새벽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동료 배우들과 각계각층 인사들은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시민과 팬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방송대중예술인단체연합회는 이날 KBS 본관과 별관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누구나 조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장르 가리지 않고 불태운 연기 열정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하던 중 연기에 눈을 뜬 뒤 일평생을 연기자로 살았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이순재는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면서 TV 브라운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드라마 ‘보통사람들’(1982), ‘목욕탕집 남자들’(1995), ‘보고 또 보고’(1998), ‘야인시대’(2002), ‘토지’(2004), ‘엄마가 뿔났다’(2008) 등 수백편의 작품에 출연했고 대표작 중 하나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인 ‘대발이 아버지’ 캐릭터로 공감을 이끌어내며 큰 사랑을 받았다. 1970·80년대 사극에 꾸준히 출연했던 이순재는 ‘동의보감’(1991),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에서 묵직한 연기를 선보이며 사극 전성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이순재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1980년대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인 것이 대표적인 일화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이순재는 국회의원으로서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다만 8년 간의 정치 생활에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이순재는 다시 연기자 생활로 돌아와 연기 열정을 불태웠다.
이미 연기자로서 경지에 오른 상태였지만 이순재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70대 들어서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을 통해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 연기에 도전했다. 이 작품에서 나온 ‘야동 순재’ 캐릭터로 어린이 팬들까지 생겨났다. 예능 ‘꽃보다 할배’(2013)로 친숙한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팔순에 접어들었을 때는 다시 연극 무대에올라 연기 여정을 이어갔다.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고 2023년에는 연출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후배 배우들과 함께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대극장 무대에 올리면서다. 지난해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마지막 연기 혼을 불태웠다.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 의지 보여
이순재는 고령에도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한 배우였지만 때로는 업계에 쓴소리를 남기는 어른으로서 귀감이 되기도 했다. 쪽대본 논란에 "완전한 사전제작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후배 배우들을 향해서는 "배우들이 한 단계 뚫고 더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 "만날 깔끔하게 멋 내는 게 배우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 항상 변신하는 게 배우"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연기란 오랜 시간 갈고 닦아 모양을 내야 하는, 완성할 수 없는 보석이다", "배우라면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배우로서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연기라는 예술적 창조 행위는 평생 해도 끝이 없고 완성이 없다"라는 연기 철학을 꺼내 보이기도 했다.
‘현역 최고령 배우’라는 타이틀과 함께 폭넓은 팬층의 애정을 받았던 이순재는 약 70년의 연기 생활로 집념의 힘을 설파하며 감동을 안겼다. 지난 1월 방송된 ‘2024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호명된 이순재는 시상식 무대에 올라와 눈물을 글썽이며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라며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는 소감으로 보는 이들에게 울림을 줬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 "조건이 허락된다면 가장 행복한 것은 공연을 하다 죽는 것이다",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 등의 말로 연기에 대한 의지와 배우로서의 소명의식을 밝혀왔던 이순재는 끝내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한 채 팬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한편 이순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는 고인에 대한 금관문화훈장 추서 가능성이 회자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순재는 앞서 지난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됐었다. 유승봉 한국방송대중예술인단체연합회 이사장은 "문체부 실무진들과 금관문화훈장 추서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라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장례 기간 내에 훈장이 추서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27일 발인식에 맞춰 KBS 별관에서 별도의 영결식을 치르는 방안도 유족과 논의 중이라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