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으로 환율방어? 하지하책(下之下策), 경제의 정치화

2025-11-25     자유일보

환율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 대신 연금공단이 나서는 나라가 한국이다.

지난 14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과 긴급 시장점검회의를 연 지 열흘 만에 기획재정부·보건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이 참여하는 ‘외환시장 4자 협의체’가 마련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정부와 외환당국이 모여 대책을 논의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협의체가 만들어진 것은 처음이다

기재부는 "국민연금 등 주요 외환수급 주체들과 협의해 환율을 안정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환율을 내리기 위해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전략이나 환헤지 비중을 조정할 수 있다는 신호까지 내비쳤다.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고환율 원인은 달러 부족이 아니라 재정적자다. 정부가 원인은 외면하고 국민 노후자산인 국민연금을 환율방어 수단으로 쓰려는 것 같다.

환율 안정은 한국은행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연금을 외환관리 수단으로 활용하는 건 지혜롭지 못하다. ‘정부가 스스로 환율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신호를 시장에 주게 된다. 중앙은행 권위가 약해지고 정책 신뢰도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수익률 극대화를 통해 국민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연금의 운용원칙을 흔들며 단기적 환율 방어에 동원하는 건 누가 봐도 경제의 정치화다.

국민연금은 장기 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해외투자 비중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이를 인위적으로 줄이거나 환헤지 전략을 변경하면 단기적으로 원화강세 효과가 있을 걸로 정부는 짐작하는 듯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수익률 하락 위험이 있다. 국민연금은 2048년에 적자로 전환되고 2060년대 중반 고갈이 우려된다. 이런 상황에서 환율방어를 이유로 정부가 연금 운용에 개입하는 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셈이다.

정부는 고환율의 원인을 모른 체하고 있다. 최근 재정적자가 심화되고 국가채무도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고환율은 경제의 기초체력 약화와 제도 신뢰 훼손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지, 단순한 달러화 수급 불균형 때문이 아니다. 당연히 연금의 자산구성 문제도 매수매도 타이밍 문제도 아니다.

환율 잡겠다고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건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설령 단기적 효과가 나타난다고 해도 미래자산을 당겨 쓰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해법은 재정 건전화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건 재정 건전화와 구조개혁을 통한 신뢰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