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극 영화 ‘패왕별희’ 일본 가부키 영화 ‘국보'
첸 카이거 감독의 중국 영화 ‘패왕별희’를 연상케 하는 일본 영화 한 편이 19일 국내 개봉했다. 일본 전통예술 가부키를 소재로 한 ‘국보’다. 일본 내 누적관객 1천만 명을 기록하고 역대 실사영화 흥행 2위를 차지한 여세를 몰아 한국 관객에게 다가섰다. 영화를 감독한 이는 재일한국인 3세 이상일 감독, 여전히 한국 이름으로 살고 영화를 찍어 발표하는 감독이다. 이 감독은 가부키의 온나가타에 매료돼서 ‘국보’를 시작됐다고 한다.
일본 실사영화 역대 2위 흥행
영화 ‘국보’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가부키라는 일본 전통예술을 소재로 인간의 욕망과 집념, 그리고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을 담아낸다. 가부키는 17세기 에도시대부터 내려오는 일본 전통극으로 음악과 연극적 요소를 결합시켜 양식화된 연기를 보여주는 대중극이다.
지난 6월 6일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는 102일 만에 누적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수익 164억 엔(약 1544억 원)을 기록했다. ‘춤추는 대수사선 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2003)에 이어 일본 실사영화 흥행 2위에 올랐으며, 이는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서 이뤄낸 23년 만의 기록이다. 이상일 감독은 이 영화로 ‘한국인 감독 최초 일본 천만 영화 탄생’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6주 동안 일본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원작소설 또한 200만 부 판매를 돌파했다. 가부키극에도 관심이 높아졌다. 가부키 공연을 주관하는 플랫폼에 따르면, 영화를 본 관객들로부터 "진짜 가부키를 보고 싶다"는 문의가 급증했고 실제 티켓 판매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천재인가 혈통인가, 두 청년의 질투와 우정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와 그를 뒤에서 바라봐야 하는 2인자 스토리는 흔한 스토리텔링이다. 영화 ‘아마데우스’(1984) 속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대표적이고, 경극이나 가부키와 비슷한 쪽에서 찾자면 드라마 ‘정년이’의 윤정년과 허영서 또한 그렇다.
영화에서는 가부키 명문가 자제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혜성같이 등장한 키쿠오(요시자와 료)가 국보 자리를 두고 겨룬다. 그 국보 자리는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 가부키 배우, 최고의 ‘온나가타’이다.
키쿠오는 야쿠자의 아들이다. 세력 다툼 속에서 아버지를 잃은 그는 간사이 가부키 명문 가문의 당주 하나이 한지로에게 거두어진다. 가문에는 이미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가 후계자로 내정돼 있었다. 하지만 야쿠자 아들 카쿠오의 타고난 재능은 정통 혈통의 슌스케를 위협한다. 슌스케는 키쿠오에 대한 질투, 집안의 압박에 시달리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피, 즉 혈통과 천재적 재능의 혈투가 가부키 세계를 통해 영화를 관통한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국보’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서로를 뛰어넘어야 하는 두 남자가 일생을 걸고 얽히고설키며 질투와 욕망을 드러낸다. 가부키에 온 청춘을 바친 두 사람의 여정이 시간순으로 이어진다.
강렬한 색감,극대화된 미장센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힘을 최대한 활용해 가부키 무대와 그 속의 배우들을 마치 ‘현실적인 꿈’처럼 그려낸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가부키 무대. 섬세한 무대미술, 의상과 분장, 배우들 몸짓과 호흡이 카메라와 결합하며 독창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도 그러했지만 ‘국보’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강렬한 색감이다. 얼굴을 하얗게 분장하는 가부키극의 특성과 혈통이라는 소재를 강조하기 위해 흰색과 빨강의 대비를 이용한다.
이상일 감독은 "실제 가부키 무대를 보는 것처럼 몰입감 있게 만들고 싶었다"며 "간단한 신은 단 하나도 없었다. 특히 무대에서 배우의 감정을 담아내는 부분이 많이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이어 "가부키 무대는 색채가 굉장히 화려하다. 다만 시대 흐름을 의식하며 색을 조정했다. 극중 캐릭터가 젊었을 때 무대와 나이 들었을 때 무대 색깔이 달리 보이도록 연출했다"고 밝혔다. 이 감독 말대로 ‘색감이 달라진’, 국보가 되기까지 50년 여정이 녹아든 마지막 무대는 영화의 메시지가 응축돼 있다.
이 같은 노력은 관객 반응으로도 이어졌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먼저 본 관객들은 "미장센이 아름다웠다", "순식간에 몰입하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고 평했다.
세계적 미술·촬영감독이 빚은 가부키 세계
일본에서 영화작업을 하고 있는 이상일(51) 감독은 ‘훌라걸스’(2006)‘악인’(2010) ‘용서받지 못한 자’(2013) ‘분노’ (2016)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감독이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은 ‘악인’ ‘분노’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이 감독은 재일한국인 3세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긴 했으나 여전히 한국 이름을 쓰고 한국 감독으로 활동한다. 그래서인지 일본 전통예술을 다룬 영화 ‘국보’가 더 새롭고 일본에서 천만 감독이 된 것이 신선하다.
키쿠오 역의 요시자와 료와 슌스케 역의 요코하마 류세이는 1년 6개월 동안 가부키를 배웠다. 코칭은 가부키 명문가 나리코마야 4대 배우 나카무라 간지로가 담당했다. 이들은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기 위해 똑바로 걷는 것부터 시작해 발을 끌듯 걷는 스리아시라는 걸음걸이, 정좌하는 법, 부채 잡는 법 등 기본 동작부터 배워나갔다.
이상일 감독은 6~7년 전 이 작품을 기획했을 때부터 요시자와 료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매료됐기 때문이다. 가부키 명문의 당주이자 국보를 지낸 간사이 가문 하나이 한지로 역은 일본 국민배우 와타나베 켄이 맡아 중심을 잡는다.
스탭으로 눈에 띄는 이는 미술감독 테나 요헤이다. 그는 타란티노 감독 영화 ‘킬빌’(2003) 시리즈의 미술을 맡았다. ‘킬빌’에서 벚꽃 흐드러지게 휘날리는 밤의 검술 대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요헤이의 미술이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촬영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로 유명한 소피안 엘 파니가 맡았다.
영화 러닝타임은 약 3시간, 길고 지루할지 아니면 여운이 길지 한국 관객들 반응이 궁금하다.
‘패왕별희’는 항우와 우희의 비극적인 죽음을 담고 있는 고사를 경극으로 엮어낸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다. 특히 우희 역을 맡은 장국영의 애절한 모습은 깊이 각인돼 있다. 경극 무대에서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머리를 깎여…"라는 노랫말과 함께 쳉쳉쳉 감기는 음악도 귀에 선하다. 우희는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극단적 선택을 했던 장국영의 성정체성과도 닮아있다. 영화에는 문화혁명도 등장한다. 경극을 퇴폐적이라 몰아붙이고 길거리에서 배우들에게 서로를 고발하게 한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다. ‘패왕별희’는 19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피아노’와 공동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