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작가] 로버트 노직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

최소 국가·최대 자유 옹호...현대 보수주의 철학 토대

2025-11-06     박석근 작가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은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정치 철학자이자 자유지상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철학자다. 노직은 1974년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라는 저서를 냈다. 이 책을 통해 세금의 무상분배를 비판하면서 최소국가(minimal state)를 옹호했다.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는 현대 정치철학의 전환점이 되었고,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정의했다.

미국의 보수자유주의 싱크탱크들은 노직의 사상에 이론적 토대를 둔다. 오늘날 미국의 부(富)는 노직의 저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티이미지

평등·재분배 강조한 ‘차등의 원칙’에 반발

노직은 초기 철학에 있어서는 사회민주적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하버드 교수 시절 존 롤스(John Bordly Ralws)의 ‘정의론’을 접하고 오히려 그것을 반박하는 방향으로 사유(思惟)를 발전시켰다. 그는 롤스가 강조한 평등과 소득재분배의 원리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국내 번역 출간된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

노직은 롤스의 ‘정의론’에서 주장한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차등의 원칙이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있더라도 그 불평등이 사회약자들에게 이익이 될 때 정당하다는 원칙이다. 즉 약자를 이롭게 하는 불평등은 허용된다는 말이다.

예컨대 어떤 제도가 부유층에게 더 큰 부담을 주더라도 그 결과로 빈곤층의 삶이 나아진다면 그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적 약자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 불평등은 부정의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직은 롤스의 ‘차등의 원칙’은 개인의 재산권을 침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자신이 자유롭게 노력해 얻은 소득을 소유할 권리가 있는데, 차등의 원칙은 그것을 국가가 강제로 재분배하게 만들어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노직의 철학은 존 로크의 소유권에 대한 철학과 자유의 절대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존 로크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노동 산물을 소유할 권리가 있으며, 자연 상태의 자원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개인의 노동이 더해지면 개인의 재산이 된다고 했다.

로버트 노직

과정 공정하면 결과의 불평등도 정당

노직은 정의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롤스는 결과의 형평성을 중시했지만, 노직은 획득 과정이 공정하다면 결과의 불평등 또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당한 과정과 방법으로 얻은 재산을 국가가 빼앗아 평등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부정의하다고 여겼다. 노직은 말했다. "정의는 분배가 아니라 자유로운 교환과 소유할 권리의 보장에 있다."

노직은 정의로운 분배란 국가가 개입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게 아니라 다음 세 가지 원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첫째, 취득의 원리로 누구나 정당한 방식으로 자연물이나 자원을 최초로 취득할 수 있다. 둘째, 이전(移轉)의 원리로 누구나 자발적인 교환이나 거래로 재산을 이전받을 수 있다. 셋째, 시정의 원리로 위 두 과정 중 불법이나 강제가 있을 때만 국가가 개입해 시정할 수 있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불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행위의 산물이며 정의로운 것이다.

노직은 국가가 징수하는 세금을 강제노역에 비유했다. 개인이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을 국가가 강제로 거두는 것은 노동에 따른 이익을 국가가 강제로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소득재분배 정책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며 자유의 침해라 여겼다.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 미국 출간본.

국가 기능은 ‘야경국가’로 최소화

노직이 주장한 국가관은 ‘야경국가’(夜警國家)로 불릴 만큼 그 기능이 최소화된 형태이다. 야경국가란 존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 국가 역할이 제한된 자유주의 국가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재산·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치안·국방·사법 기능만 수행해야 하고 경제나 개인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복지 등의 분야에도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또 국가는 복지정책이나 소득재분배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소유권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노직은 평등을 지향한 완벽한 사회를 설계하려는 시도를 부정했다. 그 대신 다양한 공동체들이 공존하는 유토피아적 다원주의 사회를 모델로 제시했다. 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회로, 각자가 원하는 가치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가 공존하는 자유연합체 사회이다.

레이건·대처 시대에 이론·철학적 근거

노직의 사상은 현대 보수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사상은 신자유주의와 작은 정부론, 개인 책임 중심의 사회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지 않는 비인간적 자유지상주의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국가권력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가진다.

노직의 사상은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이른바 레이건·대처 시대에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케이토 연구소·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연구소·후버 연구소 등에 이념적 토양이 되었다.

이들 연구소는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정책에 대해 보수철학과 가치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다. 강한 국방, 작은 정부, 자유시장 등 보수철학에 걸맞은 정책을 연구하고 정부나 의회에 제안하는 한편, 언론·학술·강연 등을 통해 대중과 정치권에 보수이념과 담론을 확산시킨다. 나아가 행정부와 의회 등 국가기관에 보수 성향 전문가와 관료를 추천하기도 한다. 노직의 보수주의 철학은 한마디로 미국의 성장 엔진이었다.

국내 번역 출간된 ' '정의론'.

실리콘밸리는 노직 유토피아의 시험장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대 부국이자 혁신의 중심이 된 데는 단순히 시장의 작용만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 싱크탱크들이 주도한 지적 인프라의 힘이 작용했다는 데 대해선 의심의 여지없다. 보수주의 싱크탱크들은 정부 개입의 한계를 설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선의 균형에 대해 철학적 논쟁의 장을 만들었고, 이것들을 정책으로 연결시켰다. 

미국 싱크탱크들이 연구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철학은 정치권으로 하여금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장기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정부가 교체되는 과정 속에서도 국가전략 중심축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에는 보수철학을 연구 보급하는 싱크탱크가 전무하다. 이는 한국 사회의 큰 숙제이다.

오늘날 미국의 부는 노직의 저서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리콘밸리는 ‘국가는 최소한으로, 개인은 최대한으로’라는 노직의 유토피아적 다원주의 실험장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협업하고 경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