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안마당의 위안부상
목포근대역사관을 오르다가 언덕 아래 정면 양지바른 곳에서 위안부상을 만났다.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었다. 목포근대역사관이 광무 4년(1900년)에 일본영사관으로 건축되었으므로 굳이 그 자리에 세웠을 테다.
위안부 운동가들이 ‘평화의 소녀상’이라 이름 붙인 위안부상은 2011년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자리 잡았다. 정대협(현재 정의기억연대)이 수요집회 1천 회를 기념하여 행정법규와 국제법을 어기고 세운 조형물이다.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은 주재국에게 외국 공관의 안녕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제22조).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소동을 벌이다가 그 상징물까지 만들어 놓고 길이길이 소동을 이어가겠다는 뜻이겠다.
이후 위안부상은 애국운동의 전리품인 양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대되더니, 급기야 고등학교 안마당에까지 들어갔다. 열혈운동가들은 해외에도 소녀상을 수출했다. 2020년 독일 베를린시에 세워진 위안부상은 5년 만인 지난 10월 17일 철거됐다. 독일의 한국인 운동가가 베를린 행정법원에 위안부상 철거를 막아달라는 재판까지 했으나 실패했다.
위안부 운동가들의 빗나간 활동을 대놓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고등학교 안마당의 위안부상 철거 운동을 하나 보다. 그러자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이 나섰다. ‘표현의 자유의 범위를 넘어서는 혐오와 차별로 간주하고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종군위안부는 태평양전쟁 시기의 현상이었다. 태평양전쟁에는 다수 조선 청년들도 참전했으므로 위안부의 실태는 당시 우리 사회에서 ‘공지(公知)의 사실’이었겠다. 그것이 세월을 건너뛰며 과장이 과장을 낳고 거짓말이 산을 이루었다.
위안부는 가난한 집안의 불행한 딸들이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과 대만의 직업여성을 전선에 공급하다가 전선이 확대되면서 위안부 모집을 늘렸다. 그래서 오빠와 애비가 팔아먹은 딸이 등장하고, 모집업자에게 속은 취업사기 피해자가 나타났다. 사정은 일본과 대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군위안부를 기획하고 이동의 편의를 제공한 제국주의 일본의 책임은 당연하지만 그쯤에서 책임은 그친다.
‘총칼로 끌고 간 조선인 소녀 20만 명’ 식의 터무니없는 선동이 어린 학생들을 자극했다. 정 교육감은 ‘위안부상 사수’를 선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위안부상을 철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과연 어느 쪽이 교육감으로서의 처신에 맞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