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벌레’가 사라졌다...태평양 심해 속 생태계 재앙 경고
태평양 심해 바닥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바다 생태계의 재앙을 암시하는 경고가 관측됐다. 이곳에서 거대한 고래 사체를 분해하며 살아가는 일명 ‘좀비 벌레’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좀비’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와 달리 좀비 벌레는 고래 사체를 분해해 심해 생물들에게 수십 년간 영양을 공급하고, 탄소 저장에 기여하는 중요한 존재라는 점에서 이의 실종은 바다 생태계의 근본적 이상을 드러내는 신호로 해석된다.
캐나다 빅토리아대학 파비오 데 레오 교수팀은 해양 연구기관 오션네트웍스캐나다(ONC)와 진행한 공동연구 결과, 태평양의 심해 1000m 지역인 바클리캐니언(Barkley Canyon)에서 좀비 벌레로 불리는 고래 사체 청소부 ‘오세닥스(Osedax)’가 10년간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파비오 교수는 "이 정도의 장기 실험에서 오세닥스가 단 한 번도 포착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는 단순한 생물 부재를 넘어 생태계 붕괴의 신호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깊은 바닷속에 서식하는 작디작은 벌레 하나에 생태계 붕괴까지 운운하는 것은 일견 과민반응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002년 처음 발견된 오세닥스는 길이가 2~7㎝에 불과하지만 해양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의 존재다. 이들은 피부에서 산을 분비해 단단한 뼈를 녹이고, 그 속의 지방과 단백질을 흡수한다. 이런 독특한 생태로 인해 오세닥스는 고래의 죽음을 새로운 생명으로 바꾼다.
실제 고래는 죽어서 심해로 가라앉는 ‘고래 낙하(whale fall)’를 통해 바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대형 고래의 사체 한 구가 수십 년간 수백 종의 생물에게 서식지와 먹이를 제공하며, 먹이 자체가 희귀한 심해 생물에게는 대를 잇고 진화를 지속할 기회가 된다. 이 과정에서 오세닥스가 고래의 뼈를 분해해 영양분을 순환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고래 한 마리의 사체가 지닌 탄소량은 해저면이 100~200년 동안 축적하는 탄소량과 맞먹는다. 고래 낙하가 전체 심해 탄소 유입의 약 0.3~4%를 담당할 수 있다는 게 과학계의 추정이다. 파비오 교수는 "결국 오세닥스가 없으면 고래 사체가 자연 분해되지 못하며, 생물 다양성은 물론 심해 탄소 순환과 영양 순환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이번 결과는 이런 순환의 고리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가 진행된 바클리캐니언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약 100㎞ 떨어진 심해저다. 자연적인 저산소 구역으로,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오가는 혹등고래, 회색고래의 주요 이동 경로다. 연구진은 이곳에 혹등고래의 뼈를 두고, 해저 관측소와 고해상도 카메라, 산소 센서를 이용해 변화를 추적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10년 동안 오세닥스는 보이지 않았다. 파비오 교수는 "오세닥스의 실종은 그들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됐다는 뜻"이라며 "해양 온난화로 인한 저산소 구역의 확장이 원인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비슷한 현상은 다른 청소 생물에서도 관찰됐다. ‘실로파가(Xylophaga)’가 그것으로, 이들은 바다에 가라앉은 목재에 구멍을 내 분해를 돕는데 연구팀이 바클리캐니언에 목재 시료를 투하해 관찰한 결과, 산소가 풍부한 해역에 비해 현저히 적은 개체만이 발견됐다.
더욱 우려를 자아내는 점은 이번 결과가 한 지역만의 현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 ONC는 북태평양의 또 다른 관측소인 클레이오쿼트 슬로프(Clayoquot Slope)에서도 고래 낙하 연구를 진행 중인데, 예비 결과에서 오세닥스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파비오 교수는 "심해는 지구의 탄소를 저장하고 순환시키는 중요한 장소로, 기후변화의 영향이 이곳에까지 미쳤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며 "이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조용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심해의 생명을 지탱하는 연결망을 끊고 지구 전체의 탄소 균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