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학의 신앙 유산 답사기] 조선 기독교 역사 생각보다 빠르다

2025-10-30     황규학 박사·前 기독언론인협회 대표
황규학

임진왜란 이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조선에서의 기독교 역사는 생각보다 빠른 것으로 드러났다. 공식적으로 천주교는 1783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때를 천주교의 효시라 보고 있다. 개신교는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온 이후를 개신교 역사의 시작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미 1783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최초로 세례받기 전에 1604년도부터 조선에 기독교인들은 존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사명대사는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의를 하고,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 이 중에서 일본에서 세례받은 사람들이 함께 귀국했다. 이때 돌아온 이들 중에 조선인 잠재적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조선에 다시 온 포로 중에 많은 사람이 나가사키에서 기독교를 만났다.

중야등(中野等)이라는 일본 학자에 의하면 일본의 조선인 천주교도들도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에 정착하여 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상황을 앞에서 본 <일본 기리시단 종문사>에 의하면 어떤 조선인인 천주교도들은 동포를 개발하기 위하여 양국에 공통된 언어 즉, 중국어의 공교요리를 향리로 가지고 갔다."

예수회의 카를로스 스피놀라 (Carlos Spinola, 1544-1622) 신부도 "일본에서 그리스도 교인이 된 많은 조선인이 포로 생활로부터 풀려나 자신의 고국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신부 자신도 마침내 조선 선교를 위해 그들과 동행할 것을 자청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로드리게스 히람 신부(Juan Rodrigues Giram, 1588-1629)는 당시 "한 기독교 신자가 조선에 사신과 함께 돌아갈 것"이라며 "일본인 천주교 신자가 한자로 쓰인 중국에서 전해 내려온 교리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여 조선인 기독교인이 조선에 돌아가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어떤 한 신분이 높은 (일본인) 천주교 신자가 대마도에 있을 때 조선 출신의 지체 높은 천주교 신자가 이곳으로 왔다. 그는 조선의 사신들과 동행하여 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 조선인은 일본인 천주교 신자가 한자로 쓰인 중국에서 전해 내려온 교리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선량한 천주교 신자는 그것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필사했다. 결국 그는 필사본을 갖게 되었으며 그는 이 책으로 조선에서 하나님의 계율을 전도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신부님 한 분을 조선으로 모셔가기를 원했지만, 당분간은 신부님을 모셔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일본학자나 천주교 신부들은 당시에 기독교인이 된 많은 조선인 신자가 조선으로 귀국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가 1785년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2만 3000명 교인으로 증가한 것은 일본에서 이미 기독교인이 된 조선의 잠재적 기독교인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