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뒤흔든 이집트 대통령 사위
1967년 3차 중동전쟁에 엘리 코헨이 있었다면, 1973년 4차 전쟁에는 아슈라프 마르완(Ashraf Marwan)이 있었다.
4차 중동전쟁 52주년을 열흘 앞둔 지난 9월 26일, 이스라엘 유력일간지 예디옷 아하로놋은 ‘20세기 모사드의 가장 위대한 스파이’ 마르완이 사실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집트 기만 작전의 선봉’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 일부를 탈환하며 1967년 패배의 상처를 씻어냈다. 국제사회와 아랍 세계에서 입지를 강화하며 장기적 평화협상 기반도 마련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영토 손실은 크게 없었지만, 전쟁 초기 이집트의 기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군사 전략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사위, ‘천사’(Angel)라는 암호명으로 널리 알려진 마르완의 이중 스파이 논쟁은 전쟁 직후 이스라엘 정보기관 내부에서 먼저 제기됐다.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와 군 정보기관 아만(Aman)은 정보 실패를 두고 심각하게 충돌했다. 전쟁 가능성을 판단하고 최종 책임을 지는 역할은 아만에 있었기 때문에, 정보 실패의 주된 책임은 자연스럽게 아만으로 돌아갔다. 모사드의 자미르(Zvi Zamir) 국장은 책임을 면했지만, 아만의 제이라(Elie Zeira) 국장은 해임됐다.
1973년 4월, 마르완은 이집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은 10만 명이 넘는 예비군을 동원하고 3500만 달러를 지출했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0월에는 마르완이 이집트의 공격 시점을 실제보다 4시간 늦게 알려줘 이스라엘은 초기 대응에 큰 혼란을 겪었다. 아만은 마르완이 준 정보로 이스라엘이 실제로는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했다. 아만은 그를 이집트의 이중 스파이로 의심했다. 그러나 1969년부터 마르완을 관리해 오던 모사드는 그를 신뢰했고, 그의 정보가 전쟁 대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93년, 아만의 제이라 국장이 회고록에서 마르완을 이중 스파이로 지목하며 그의 신분을 공개했다. 2004년, 모사드의 자미르 국장은 제이라가 마르완의 신분을 외부에 유출했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07년 6월 13일, 이스라엘 법원은 제이라가 마르완의 신분을 유출한 것이 맞다고 최종 판단했다. 모사드와 아만의 서로 다른 관점과 갈등이 마르완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의 신분을 외부에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2주 뒤인 2007년 6월 27일, 마르완이 런던 아파트 발코니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1973년 전쟁 이후 사실상 모사드와의 관계가 끝난 상태였고, 무기 거래와 부동산 투자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상태였기 때문에, 명확한 자살 동기는 찾기 어려웠다. 회고록 초안과 관련 자료들이 사라지고, 사망 상황이 의문스러워 타살 가능성도 제기됐다. 마르완의 부인은 모사드가 그를 암살했을 것이라 의심하기도 했다.
이집트는 마르완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마르완은 진정한 애국자였으며, 그의 충성은 이집트에 있었다"라고 치하했다. 해외 요원이나 협력자에 대한 언급을 삼가는 관례에 따라 모사드는 침묵을 지켰지만, 일부 언론은 이집트 정보기관이 마르완을 제거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마르완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쪽 모두의 영웅이었고 배신자였다. 스파이는 태생적으로 두 얼굴을 가진 존재다. 마르완의 이중 스파이 가능성을 제기했던 9월 26일자 예디옷 아하로놋의 보도도 결정적 증거는 내놓지 못했다.
스파이의 정체성은 결국 그의 신념에 의해 결정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러나 이미 추락해 버린 천사의 진정한 얼굴은 어쩌면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