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색 불교' 몰아내고 불교 정화...불교 중흥 공헌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㉘ 우남과 불교의 발전 해방 직후 불교계 갈등 극에 달해...이승만 유시 통해 불교 변화 촉구 농지개혁 때도 사찰 자산은 보호...귀속재산 불하시에 불교계에 혜택 불교유물 보물 지정 등 각종 지원...오늘날 불교계 발전에 남다른 노력

2025-09-22     양준모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장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기독교인이다. 우남은 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폄훼하거나 종교인을 핍박한 적이 없다. 더욱이 우남은 불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불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우남의 모친은 불교 신도로 파주 용암사 쌍미륵불에 기도한 후에 우남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직도 파주 용암사에는 1954년 우남의 시주로 건립한 동자상이 있다. 우남은 유시에서도 본인이 어렸을 적에 불당에도 다녔고, 불공에도 참여했음을 강조했다. 우남은 "명산대천 곳곳에 유명한 사찰과 불당이 있어 각각 빛난 역사를 가졌다"고 지적하면서 불교 유산을 자랑스러워했다.

◇ 일정기 지나 해방 직후 불교계 갈등 심화

우남은 1913년에 저술한 ‘한국교회핍박’에서 1910년부터 일본이 조선을 일본으로 만들려고 추진한 일본의 종교 정책을 힐책했다. 1910년 일본은 각황사(지금의 조계사)를 4대문 안에 창건하도록 허락하고 일본에서 행하는 방식대로 재(齋)와 불공을 드려 백성들이 모여들도록 했다. 일본은 동학 잔당을 도와 일본에 도피해 있던 손병희와 이용구를 이용해 천도교나 사천교를 만들도록 했다. 우남은 소수의 조선인 단체도 만들지 못하게 하면서 100만 명의 동학도 단체를 설립하도록 허락하는 일본의 저의를 지적했다.

일본은 1911년 사찰령을 통해 조선의 불교를 장악했다. 사찰의 기지와 가람, 사법(寺法), 재산 등 모든 것에서 일본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이에 따라 조선 불교에 30본산(三十本山) 체제가 구축됐다. 30본산 체제는 일본의 본말(本末)제도에서 유래됐다. 에도 막부시대에 시행된 본말제도는 본산과 말사의 위계질서를 구축해 막부가 불교를 장악하는 제도다. 1910년 10월 한일병합 후 당시 원종의 대종정이었던 이회광은 조선 불교의 발전을 위해 일본 불교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시도했다. 이에 반발한 스님들은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천명했으나, 이런 운동은 30본산 체제 확립 후 소멸했다.

1953년 10월 11일 경남 합천 해인사 석불과 이승만 대통령(가운데).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만해 한용운은 1913년 ‘조선 불교 유신론’을 저술해 불교 개혁을 주장하고 대처식육론(帶妻食肉論)을 내세웠다. 만해는 1910년 두 차례나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고, 이후에도 대처 운동을 했다. 1926년 3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평의원회가 사법 개정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해 4월 20일 대처승도 주지가 될 수 있었다. 5월 백용성 스님은 석왕사와 해인사 주지 등 127명의 서명을 받아 승려의 ‘대처식육’을 금지해달라는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면서 저항했다. 조선 불교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풍습이 일정기 조선총독부와 사찰령의 힘에 의존하여 확산했다. 불교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이고 우리가 해외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이런 변화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1930년대 불교청년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용조는 조선불교계에 파쟁독, 주지독, 대처독이라는 삼독(三毒)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정기에 불교계의 세속화와 영리 추구로 승단조직과 사원경제의 혼란과 파탄이 초래될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비구승의 지계정신(持戒精神)과 수좌 전통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1953년 11월 13일 서울 경국사를 방문해 경내를 둘러보는 이승만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 불교 문화를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우남은 외빈이 오면 사찰에 모시고 스님들의 말씀을 들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불교계 갈등은 해방 직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태고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는 조선불교조계종 간부를 교체하고 총독부의 종명을 폐지하고 조선 불교로 명명한다. 1946년 12월 불교청년단 등 개혁단체들은 불교혁신총연맹을 결성해 대처승으로 구성된 총무원과 대립했다. 1947년 청담 스님, 성철 스님을 비롯한 비구 수좌 20여 명이 중심이 된 봉암사 결사나 백양사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결성된 고불총림(古佛叢林) 등이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1951년 3대 교정으로 만암 스님이 취임하면서 정화를 선언한다. 비구 측은 새로운 종정으로 동산 스님을 추대했다. 양측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 우남, 불교 발전 위한 다수 지원책 마련

건국 후 세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됐다. 9월 3일 우남은 독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라고 촉구했다. 10월 20일 미국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도모했다. 우남은 1952년 1월 18일 해양 주권을 선포했고 2월부터는 한일회담이 시작됐다. 1953년 10월 15일 구보타 간이치로의 막말 사건으로 한일관계 개선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외적으로 일본과 대립하고 있었다. 반면 일부 불교 사찰에서는 우리 문화를 버리고 일본을 찬양하는 행태가 자행되고 있었다. 우남은 불교계의 변화를 촉구했다.

우남은 1954년 5월 21일 1차 유시에서 김보현 대사의 정성스런 사찰 사랑의 예를 소개하면서 사찰 안에서 살림살이하는 것을 경계했다. 1954년 11월 4일 유시에서는 "모든 승려들은 먼저 애국정신을 발휘해서 일제히 대궐기하여 일본의 정신이나 습관들을 흡수한 것은 일체 내버리고… 대한민국의 만년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남은 유시의 이유를 설명하며 재차 불교계를 설득한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1956년 6월 14~15일 이틀간 전용열차 편으로 전남 구례 화엄사 시찰을 떠났다. 사진 중앙에 화엄사 경내를 둘러보며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보인다. 이 대통령의 오른쪽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조계종 화엄사 초대 지주 인곡스님이 있고, 뒤편에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인 레이먼 렘니처(L.L Lemnitzer) 장군이 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1962년 1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불교재건위원회를 출범시켜 불교계 갈등을 사회 안정 차원에서 처리했다.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이 출범했다. 1965년 3월 화동추진위원회가 구성돼 대처승 포섭 노력이 있었으나, 1969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비구 측이 승소했다. 1970년 대처승은 화동파를 배제하고 태고종을 창종했다.

우남은 각종 유시에서 자율적인 해결을 종용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법적인 정책을 택했다. 어느 쪽이나 불교의 발전을 염원했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었다. 혹자는 불교의 정화 운동을 법난으로 규정하고 우남이 법난을 촉발했다고 우남을 비난하기도 한다. 우남의 불교 유시는 법난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발전을 위한 고언이었고, 우남의 유시와 불교 정책으로 오늘날의 불교가 발전하게 됐다.

우남은 불교 발전을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1952년 12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사찰 보호를 기하라는 지침을 발표하고, 1953년 7월 6일 농지를 사찰에 돌려주었다. 귀속재산 불하 시에 불교계에 혜택을 줬다. 불교계는 충북여객, 충주비료, 전남여객, 대광유지공업(목포유지공장), 인천베어링(봉선사), 강원여객, 영도조선소(통도사), 영도도자기, 밀양내화벽돌, 부산백화점, 경기여객, 자유극장, 대구 백화점, 충남여객, 대전백화점, 서울 한성극장, 마산 소모사 공장, 청구양조장, 전주도정공장, 전남유지(광주), 통영조선, 동래방직, 밀양모직 등을 불하받았다. 사찰의 평균 불하금액은 평균보다도 약 1.4배 많았다.

우남은 불교의 유물을 보물로 지정하고 근처의 명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불교계의 수입 증대에 일조했다. 또한 우남은 사찰 근처 사하촌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지원책을 마련하고 실시했다. 오늘날과 같은 불교계의 발전에는 우남의 노력과 공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