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투시경] 정세가 어지러울 땐 ‘비타협 가치’ 먼저 지킨다

2025-09-21     손광주 자유통일연구소 소장
손광주

역사에 남는 명문(名文)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명문만 역사에 남게 된다. 보편성·항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항구성에 미달되면 명문이 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戰後) 질서 재편 이후 지금까지 최고의 명문은 세계인권선언이 아닐까 싶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그 권리에서 있어서 동등하다…"로 시작하는 세계인권선언 제1조를 처음 접하며 누구든 가슴이 뛰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전문(前文)과 30개 조로 되어있는데, 1, 2조에 인류사회의 보편적·항구적 가치가 농축돼 있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제1조) 하고, 제2조는 "인종, 피부색, 남녀,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 없이(…), 개인이 속한 국가 또는 영토가 독립국, 신탁통치 지역, 비자치 지역이거나 또는 주권에 대한 여타의 제약을 받느냐에 관계없이,(…) 차별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로 되어 있다.

인권(人權)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기본권이다. 남녀·인종·종교·국가도 초월하는 기본권인데, 하물며 한 국가의 좌우, 이른바 보수-진보와 무슨 관계가 있겠나.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인권 문제는 오직 인간의 기본권 범주에서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규정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땅에는 괴상한 미신(迷信)이 돌아다닌다. 북한인권 문제를 온전히 인권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어린이 인권을 걱정하면서 서울에서 불과 60여km 떨어진 2400만 북한주민 인권 문제는 세계인권선언의 범주 바깥으로 밀어낸다. 인권 문제가 여야 정당의 정쟁이 된 지 30년이다. 2016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해 놓고도 북한인권재단을 만들지 않는다. 자기 집안 청소도 안 하면서 안방에 드러누워 히말라야 쓰레기 걱정을 하는 놈팽이(룸펜)와 다를 바 없다. 북한 세습독재정권은 변화 대상, 2400만 주민은 구출·지원 대상이라는, 지극히 명료한 정치적 1차 방정식조차 풀지 못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붕괴됐다. 근본 이유는 사회정치적 가치가 전도(顚倒)됐기 때문이다. 반미(反美)운동이 민주화 운동이 되고, 김일성주의가 진보(進步)가 되는 사회정치적 정신병을 앓은 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정치 분야는 고쳐진 게 없다. 반미·반일·친북을 진보로 믿은 환자들이 여전히 국회를 떠나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북한인권 문제를 세계인권선언의 관점에서, 인류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나.

정치의 본령은 안정적 사회 관리다. 그 기초 위에 현존 상황보다 발전된 단계로 진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꾸로 됐다. 지난 10년간 행정·사법에 대한 무차별 탄핵에 두 번의 대통령 탄핵까지, 정치권 발(發) 사회 불안정 요인들이 더 많다. 이제는 입법·행정·사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까지 흔들어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외에서 객관적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관찰하면 마치 ‘정치적 귀신병’이 들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죽은 지 140년이 넘었지만 한반도 북쪽은 여전히 마르크스·레닌·모택동·김일성 귀신들이 상공을 배회한다. 시진핑의 뇌세포엔 마르크스·모택동·자본·전체주의 테크(tech)가 버무려져 있을 것이고, ‘조선반도는 옛적부터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케케묵은 정보가 등록돼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주적(主敵)은 마르크스부터 시작된 바로 이 귀신들인데, 문제는 우리사회에 이 귀신병에서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정치인·지식인들이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오는 10월 말 경주 APEC 회의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이 만난다. 트럼프는 이 APEC 회의를 계기로 관세협상을 마무리하고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 평화’ 정국으로 이행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한반도 평화 구상’이 어떤 모습인지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이후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내년부터 한반도 이슈가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내년부터 우리의 국내외 정세가 동시에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 흔들리는 상황에 진입했다. 정세가 복잡해질 때 우리가 할 일은 보편적·항구적인 가치, 양보할 수 없는 비타협적 가치를 우선 지키는 것이다. 자유·인권·민주주의·법치·시장의 원칙, 특히 대북정책은 북한인권 이슈를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