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퇴치·의무교육·사학 육성...교육체제 완성한 '교육 대통령'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㉗ 우남의 교육정책과 국가발전 '만민 평등은 하나님의 뜻' 철학 실천...하와이서 첫 남녀공학 학교 운영 빈약한 재정에도 국민학교 의무교육...가장 짧은 기간 문맹 퇴치한 나라로 공용문서·신문잡지 한글 표기 정착...고등교육 받은 인재 양성 국가 발전

2025-09-15     양준모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장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건국 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남은 평생 교육에 헌신한 교육자이다. 1902년 우남은 ‘뎨국신문’에 교육의 자유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우남은 세계 유명 대학교들이 자율적으로 학사를 운영하고 존경받는다고 주장했다. 1903년에는 ‘신학월보’에 ‘교회경략’이라는 기고문에서 만민 평등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1904년 우남은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장직을 수행했다. 1910년 우남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YMCA에서 학감으로 교육과 전도 활동을 했다. 일제 탄압으로 1913년 미국으로 망명한 우남은 하와이에서 한인기숙학원 교장직에 취임해 활동한다. 우남은 한인기숙학원을 한인중앙학교로 개명하여 학생 수를 거의 4배로 증가시켰다. 한인중앙학교는 최초의 남녀공학제도로 운영된 학교였고, 우남은 자신의 신념인 남녀평등 사상을 실천했다.

◇ 문명 퇴치·의무교육 통해 교육체제 완성

1914년 7월 29일 우남은 한인여자(성경)학원을 설립하고, 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하여 1928년까지 미국 감리교와는 독립적인 한인 교육 기관을 운영한다. 한인기독학원은 교육과 기독교 지향의 학생 활동,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 지도자 양성, 그리고 사회교육의 추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다. 동 기관은 1928년 이후 하와이령의 공립학교제도가 발달하면서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1945년 폐교됐다. 동 기관의 재단은 1955년 청산돼 인하공과대학 설립 기금으로 기부됐다. 우남의 이런 교육자로서의 경험과 철학은 건국 후 교육정책에 그대로 투영된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설립된 한인기독학원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여학생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건국 후 가장 중요한 교육 과제는 문맹을 퇴치하고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교육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문맹률은 해방 직후 77%에서 정부 수립 당시 42%로 개선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문제였다. 성인교육이 문맹 퇴치 교육에 집중됐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문맹 퇴치 이외의 더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기에는 재정적 여건이나 실제 수요적 여건이 조성돼 있지 못했다.

1949년 5월 우남은 교육기본법, 교육법, 사회교육법 등을 제정하여 다양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려 했으나 국회 논의 과정에서 교육 관련 법들은 교육법으로 통폐합됐다. 1949년 12월 교육법이 제정돼 체계적으로 교육정책이 집행됐다. 1950년 5월 30일 문교부는 문맹 퇴치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 따라 1차년도 교육 대상의 수는 65만 명이었다. 문교부는 대학, 사범학교, 고등학교 학생 등을 활용해 농촌계몽 및 국민 계몽교화 사업을 추진했다.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는 1959년에 문교부는 어느 정도 문맹을 퇴치했다고 판단하고 잔존 문맹인을 교육하는 정책으로 전환한다. 1953년 문맹률이 26%였다가 1958년 4.1%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우남은 문맹 퇴치만 아니라 실업교육에도 관심을 두고 구체적 정책을 추진했다. 1958년 문교부는 산업기술교육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산업진흥을 도모하면서, 인문과 진학 중심의 교육 관습을 시정하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해방 후 교육열이 증가하여 교육 수요는 급증하고 있었다. 국민학교 학생 수는 1945년 약 154만 명이었으나, 1947년 약 224만 명으로 급증했다. 우남은 빈약한 재정을 집중해서 의무교육에 쏟았다. 우남은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에서 사학의 도움을 받아 균형 잡힌 교육 체제를 구축했다. 재정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공적 재원으로 추진한 나라들의 실패 사례를 보면, 우남의 전략이 얼마나 탁월한 전략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 인재 양성 위해 자율적인 사학 환경 구축

우리 교육의 우수성을 빛낸 교육 기관은 사학이었다. 사학은 조선말에는 개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우남이 다녔던 배재학당이 대표적이다. 일정기 사학은 국권 회복의 중심지였고 민족교육의 온실이었다. 건국 후 사학은 대한민국 교육을 이끄는 동력이었다. 정부가 의무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했고, 사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만들어 균형 있는 교육 발전에 공헌했다. 사립 중학교는 1945년 33개에서 1952년 232개, 1957년 1034개로 급증했고, 전체 중학교 중 사립 중학교의 비중도 각각 19.9%, 38.2%, 41.0%로 빠르게 증가했다. 사립 고등학교 수도 1952년 109개에서 1957년 256개로 급증했고, 비중도 31.9%에서 41.9%로 늘었다. 대학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사립 대학교의 수는 1945년 10개에 불과했지만 1952년 37개, 1957년 56개로 비중은 각각 52.6%, 75.5%, 71.4%로 증가했다. 고등교육에서 사립학교의 역할은 지대했다.

1954년 10월 7일 인하공대 개교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교기를 수여하는 모습. 왼쪽은 이기붕 민의원 의장이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사립 교육 기관을 운영한 경험으로 사립학교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지원했다. 농지개혁을 추진할 때, 우남은 교육 기관이나 학술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농지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인재 양성을 위해 고등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김흥배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김흥배는 1952년 12월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신청을 내고 인가를 받았다. 대학 설립이 늦어지자, 1953년 7월 31일 우남은 김흥배에게 빨리 대학을 설립하라고 촉구하면서, 조국 재건과 국제교류에 기여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우남의 관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은 신속하게 설립될 수 있었다. 우남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한인기독학원의 기금을 청산하여 인하공과대학 설립 기금으로 기부했다. 우남은 세계적인 공과대학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으로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했다. 우남은 인재 양성을 위해 자율적인 사학의 환경을 만드는 데 노력했다.

우남의 한글사랑은 특별했다. 우남은 과거 시험을 준비했던 사대부였고, 옥중에서 한시를 작성할 정도의 한학자였지만,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고 한자 폐지 운동에 힘을 실었다. 미 군정기인 1945년 12월 8일, 교육심의회에서 최현배 중심으로 한자 폐지 결의안이 채택된다. 건국 이후에 한글 전용의 목소리는 커졌다. 우남은 1948년 10월 9일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을 반포하면서 한글 전용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문에서 우남은 ‘세계에서 제일 과학적으로…단시일 내에 배워 읽고 쓰지 못할 사람이 없으며’라고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성을 지적하고, 한글 전용을 독려했다. 우남은 여러 논란을 검토해 1955년 한글전용법을 발표한다. 한글전용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공용문서와 신문잡지 및 공중표지물은 한글로 써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 한자를 괄호 안에 첨서(添書) 하도록 했다. 1959년에는 거리 간판의 한자 강제 추방 정책이 추진됐다.

우남은 교육 체제를 완성했고 문맹 퇴치와 인재 양성으로 국가발전을 이끌었다. 우남은 만민 평등의 사상을 실천하고 여권 신장과 여성 교육에도 헌신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한민국과 같이 짧은 기간 문맹을 퇴치한 나라도 없고 대한민국과 같이 빠르게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를 양성한 국가도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우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