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피살된 최덕근 영사를 기억하며
기원전 227년,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한잔 술을 뒤로한 채 장사는 처연하게 떠났다. 암살은 실패하고 장사는 오단팔렬(五斷八裂), 갈가리 찢어졌다.
기원전 91년, 동중서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나라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자객을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비장한 영웅"으로 기록했다. 다시 500여 년, 동진의 시인 도연명은 협객을 시로 남겼다. "그 사람 비록 죽었지만, 천 년이 지나도 그 뜻은 남으리."
중국 연나라 이름 없는 한 무사가 사마천의 ‘자객 열전’을 통해, 도연명의 ‘영형가’(詠荊軻, 형가를 노래하다)를 통해 의로운 협사(俠士)로 그 아름다운 이름, 형가를 천추만대에 남겼다. 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뜻, 역사가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최덕근 영사를 생각할 때마다 형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두 사람은 묘하게 닮았다. 두 사람 모두 무술의 달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신념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두 사람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덕근은 매사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심이었다. 연해주 일대에서 북한의 위조달러 유통을 추적하는 데도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국제농업개발원 이병화 원장이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손해를 봐도 미국이 보지 우리가 봅니까? 미국 영사관도 가만 있는데 왜 영사님이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라고 물었다. 최덕근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비록 미국 돈이라곤 하지만, 그 돈은 김정일 정권을 지탱하는 자금줄이 됩니다. 국가가 저를 여기로 보낸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뜨거웠다. 최덕근은 그런 사람이었다.
1990년대 블라디보스토크는 소련의 붕괴로 체제와 경제가 무너지고 범죄조직이 득세하면서 사실상 무법천지였다. 같은 시기 북한도 극심한 경제난으로 연해주와 하바롭스크에 만여 명의 노동자를 파견하면서, 그중 일부는 위조달러 유통·마약 밀매·인신 매매 등 불법 활동에 동원했다. 북한은 최덕근의 적극적 정보활동을 공세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최덕근은 북한의 견제와 보복 위험에 노출됐다.
당시 국내는 국내대로 긴장 국면이었다.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함의 무장공비들이 산악지대를 통해 북상하면서 군경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준전시 상태가 지속됐다. 북한은 방송을 통해 연일 ‘백 배, 천 배 보복’을 위협하며 한반도 정세를 압박했다.
국내외 일촉즉발 불안했던 조짐이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폭발했다. 1996년 10월 1일 20시 50분경, 최덕근이 주거지 아파트 계단에서 피살됐다. 그날따라 항상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던 러시아 할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작동되지 않았다.
최덕근의 유품에서 메모가 발견됐다. ‘사나이가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다! 그것은 여한이 없는 일이다.’ 진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역수를 건너던 자객, 형가의 심정이 이랬을까! 최덕근은 어쩌면 자기의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게 아니고 기록하는 자가 승자다. 영웅은 과거가 아니고 살아있는 자의 맹세다. 최덕근 추모 행사는 최덕근 개인을 기리는 행사가 아니다. 최덕근을 통해 국가를 최우선으로 살다 이름 없는 별로 남은 모든 영웅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산 자들의 서약이다.
그동안 ‘최덕근을그리워하는사람들’ '국가정보연구회'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등 민간단체가 주도해 오던 최덕근 영사 추념 세미나가 올해는 국가정보원 퇴직자들의 모임인 양지회 주도로 오는 16일 양지회관에서 개최된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