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6·25 참화 딛고 고도성장 토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㉓ 우남이 극복한 경제발전의 장애물들 해방 후 무역·경제 활동 단절로 대혼란...北 6·25 남침에 경제기반 파괴 1950년 한국은행 설립 금융안정 도모...인플레 극복 위해 통화개혁 단행 헌법 개정으로 시장경제 강화...세계 최고 수준 산업 생산 증가율 달성
우남은 새로 건국된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킨 경제 지도자였다. 우남은 ‘독립정신’에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드는 필수 요건으로 통상을 강조하고, 영국의 사례를 들면서 안보와 경제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남은 국제통상을 잘 이해한 지도자다.
우남은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1924년 동지식산회사 설립을 주도한다.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우남은 농민과 기업인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경제를 부흥시킬 지혜를 터득했다. 우남은 우리 민족의 고난을 극복할 준비된 지도자였다.
◇해방 이후 극심한 혼란 속 경제 부흥 도모
우남은 건국 이후 경제 발전의 장애물들은 극복하고 부국의 기초를 다졌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우남과 같이 어려운 경제 운영 과제를 극복한 지도자는 없었다. 우남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맞이한 어려움은 우선 경제 활동의 단절에서 오는 경제체제의 붕괴다. 두 번째 어려움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 파괴다. 세 번째 어려움은 시장경제 체제 형성 미흡과 원조의 내생적 문제에 발생된 장기 경제 발전의 장애물이다. 우남은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하고 경제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이런 어려움을 극복했다. 이를 통해 우남은 이후 고도성장의 기초를 만들어 낸다.
1775년 영국은 미국 식민지가 독립운동을 강화하자 미국 식민지의 무역을 금지한다. 1776년 4월 6일 대륙 의회는 영국의 조치에 대항하여 영국의 무역 금지 조치를 부정하고 미국의 항구는 영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와 교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776년 7월 4일 미국은 영국의 무역 금지 조치와 동의 없는 세금 부과에 항의하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은 최혜국 대우를 통해 영국의 무역 금지 조치를 우회하여 다른 나라와 교역하려고 시도했지만, 영국의 무역 금지 조치의 타격을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은 1774년에서 1781년까지의 기간에 일인당 실질 소득이 15% 하락하는 등 대공황과 같은 극심한 경제 불황을 경험했다.
해방 이후 우리 경제도 무역과 경제 활동 단절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북한은 해방 전 한반도에서 화학공업의 82%, 금속공업의 78%, 전기기구공업의 80%, 발전량의 92%를 담당했었다. 1941년 대비 1948년 공장 수는 40.3%, 직공 수는 29%가 감소했다. 생산액은 1939년 대비 83% 수준에 불과했다.
북한과 만주에서 내려온 귀화민으로 남한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과 반란 사태는 경제를 더욱 어렵게 했다. 대한민국은 건국됐으나 공산주의자들은 매족 행위와 폭력 행위를 일삼았고, 북한이 지속적으로 안보를 위협했다. 이에 따라 인원도 적은 경찰은 과중한 업무로 고통을 받았고, 과세 기반이 빈약한 상황에서 치안 관련 지출로 재정은 적자에 시달렸다.
해방 이후 소련은 북한에게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지원을 공여했지만, 미국은 각종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1947년 미국의 일본조선경제 과장인 에드윈 마틴(Edwin M. Martin)은 일본 중심의 지역 통합을 시도한다. 그는 대일 원조부담을 경감하고 자립적인 일본경제를 재건해 극동의 경제 부흥을 계획한다. 자연스럽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945년 9월 조선에서 일본인이 소유한 부동산과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한 동산을 몰수해 미군정에 귀속시킨다. 미군정은 이후 귀속재산을 조선에 불하(拂下)하기 시작했다. 우남은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해 귀속재산을 활용해 경제 부흥을 도모한다.
◇통화개혁 등 고도성장 위한 계획 수립
우남은 1948년 12월 10일 한미 조약을 맺고 미국의 경제협조기구(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ECA)와 부흥 계획을 논의한다. ECA는 에너지 기반 확립, 수산업과 광산업 등 수출산업 진흥, 사회간접자본 확충, 기술 교육, 그리고 적산 처리 등에 관한 원조 계획을 수립한다. 1949년 1월 우남은 대통령령으로 임시외자총국직제를 만들어 국무총리 소속 하에 임시외자총국을 두고 외국원조물자 사무를 관장케 했다.
1949년 6월 7일 미 의회에 1억 5000만 달러(약 2085억 원)의 ECA 대한원조안이 상정됐지만, 대중국 정책의 실패에 대한 공화당원의 비판으로 한국 원조법안은 미 의회를 통과하지 못한다. 1950년 미 하원에서 대한원조계획안이 승인되고 1950년 3월 ECA 원조자금으로 기술연수생 65명이 미국과 일본에 파견되고 기술자 양성을 위해 한국기술원이 설립된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면서 우남의 경제 부흥 노력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난관에 부딪힌다.
우남은 이런 상황에서 시장경제 체제를 정비한다. 1950년 2월에 설립된 한국식산은행을 폐지하고, 1954년 4월 한국산업은행을 설립한다.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을 설립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1954년 우남은 헌법을 개정해 시장경제 체제를 더 강화한다.
1950년 12월 1일 미국은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UNKRA)을 창설하고 전쟁 중인 대한민국을 돕는다. 1954년 6월 13일 UNKRA는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제시하고 UNKRA에 참여한 40개국들과 원조 금액을 모았으나, 모금에 어려움이 있었다. 우남은 미국이 부담한 930만 달러만을 가지고 전후 생활 개선 작업을 시작한다. 미국은 1953년 대외활동본부(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FOA)를 만들어 경제원조를 지속했다. FOA는 군사 원조에 주력했으며, 1961년 11월 국제개발기구(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AID)가 설립될 때까지 대한 원조를 담당했다.
원조 경제의 치명적 단점은 생산력이 조기에 확대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조가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이것은 국토와 경제 활동을 파괴하는 전쟁의 속성이다.
우남은 전쟁의 참화를 가장 빠르게 해결한 지도자다. 우남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1953년 통화개혁을 한다. 경제 안정 없이 경제 발전은 불가능하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저축 유인을 줄이고 장기 금융 시장을 마비시킨다. 경제 안정은 단기적으로 경기를 침체시키기 때문에 인기 없는 정책이다.
우남은 강경 입장으로 경제 안정을 달성한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경공업과 중공업의 연평균 산업 생산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을 보였다. 국민소득 증가율은 1954년 9.5%, 1955년 5.6%, 1956년 0.6%, 1957년 9.4%, 1958년 6.6%, 1959년 5.6%였다. 극심한 흉년인 1956년을 제외하면 동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의 7.8%에 버금하는 수준이다. 우남은 1958년 고도성장을 위한 경제 계획을 수립한다. 아쉽게도 역사는 우남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