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기의 듣는 인간 Homo Auditus] (88) 듣기와 말하기 사이 긴장
인간의 행위 중에 긴장을 수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서 어떤 효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긴장 없음’과 ‘의미 없음’은 같은 말이다.
즐거움조차도 그것을 의미 있게 누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긴장이 필요하다. 적절한 긴장을 ‘효능성’(Efficacyy)으로 대치하기도 하고, ‘생산적 긴장’(productive tension)이란 말이 등장하면서 긴장의 심리적·사회적 순기능에 주목하게 됐다.
인간의 듣기 활동에도 긴장은 중요하다. 긴장이 사라진 대화 관계에서는, 듣기는 쓸쓸하고 말하기는 공허하다. 예컨대 두 연인이 여태껏 함께 걸어온 길을 버리고 각기 다른 길로 갈 때,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긴장이 사라져 버린 대화란 어떤 의욕과 동기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마음자리일 뿐이다.
듣기와 말하기의 관계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관계처럼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인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가까워지듯, 아는 것과 모르는 것도 서로를 스며들도록 하는 데로 나아간다고 본다. 인간은 모름을 통해서 앎의 경지를 두드리게 되고, 앎을 통해서 모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듣기와 말하기도 서로 그런 생산적 긴장을 발휘하면서 격과 질을 높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를 떠올린다. 그는 현대 신학을 철학·문화·심리학·예술 등과 연결하려고 노력하며, 학문적 소통에서 생산적 긴장을 살리려 했다. 그의 저술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51)은 질문과 대답의 작용을 이렇게 말한다. ‘질문의 형식이 대답에 영향을 주고, 대답의 내용은 질문의 내용을 결정한다.’
듣기와 말하기 사이의 긴장된 선순환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동시에 소통의 보편적 격률이라 하겠다. 잘 듣는 이가 잘 말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