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숨은 이야기]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Happy Tears)
예술이 된 만화...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의 경계를 허물다
팝아트라 하면 대부분 앤디 워홀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유명한 먼로 시리즈부터 캠벨수프 등이 워홀의 연관어다. 그에 비해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상대적으로 국내에 덜 알려졌다. 그의 이름과 대표작 ‘행복한 눈물’이 시선을 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삼성그룹 관련 이슈일 것이다. 당시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그림도 유명해졌고 그 가격 또한 덩달아 유명해졌다.
예술 안으로 들어간 대중문화
팝아트(pop art) 란 대중문화(popular)와 미술(fine art)이 결합해 생긴 새로운 장르다. 1950년대 후반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대중 소비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팝아트의 등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대량생산 소비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시기에 TV 광고·잡지·만화 등 대중매체들이 생겨나고 확산됐고, 일상생활은 이것들이 만든 이미지들이 지배했다.
당시 주류예술은 심오하고 난해했으며 사적 감정 표현에 치중한 나머지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팝아트 작가들은 예술은 대중과 소통해야 하고, 예술이 일상생활로부터 유리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대중문화 이미지를 거부했던 주류예술가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받아들였다.
팝아트 작가들은 코카콜라와 캠벨수프, 마릴린 먼로 같은 유명 연예인·만화·광고 등 대중에게 친숙한 상업적 이미지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예술의 고상한 이미지를 깨뜨리는 것과 동시에 대중적 소재를 예술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수작업(手作業) 대신 현수막 광고 제작에 사용되는 실크스크린 기법 등 공장에서 생산되는 기성품처럼 예술작품을 생산했다. 이는 예술을 개인적 영역에서 대중적 영역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특정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배열하거나 확대했다.
만화 이미지 확대 캔버스에 옮겨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은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다. 그는 만화책 이미지를 확대해 캔버스에 옮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인쇄물을 확대했을 때 나타나는 작은 점들, 이른바 벤 데이 점(Ben Day Dots), 흔한 표현으로 도트를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방식이다.
그는 수작업으로 이 점들을 캔버스에 그려 넣어 작품에 인쇄물 같은 느낌을 부여했다. 자신의 작품이 대량생산된 만화 이미지를 차용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적인 장치였다.
그는 당시 인기를 끌던 전쟁 만화나 로맨스 만화의 한 장면을 가져와 확대했다. 만화의 단순한 형태, 강렬한 색채, 말풍선 등을 그대로 옮겨와 그렸다.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만화가 표현한 감정을 극적으로 과장하거나, 소비지향 사회를 풍자하는 등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위트 있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만화를 베낀 게 아니라 만화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 남녀 관계, 전쟁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탐구하고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타자화된 감정 그린 ‘행복한 눈물’
대표작 ‘행복한 눈물’은 눈물 흘리는 여인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여인의 표정은 평온하지만 눈물이 흐른다. 감정은 눈물로 흘러내리지만 얼굴은 단정하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입꼬리는 미소 지을 때처럼 올라가 있다. 이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로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때 눈물을 흘리는 인간을 보여준다.
그림 속 여인은 마치 극적인 장면의 주인공처럼 연출돼 있고 감정 표현은 과장스럽다. 눈물 흘리는 여인의 상황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여성의 감정이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여성의 감정을 대중이 바라보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처럼 ‘행복한 눈물’은 진정한 감정이라기보다 연기된 감정으로 보인다.
‘욕망하는 것은 알고 보면 타자(他者)의 욕망이다’라고 말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철학을 빌리면 ‘행복한 눈물’의 여인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허용된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 여인은 타자(대중)가 바라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눈물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기대하는 눈물이다.
결론적으로 ‘행복한 눈물’은 팝아트 기법을 빌렸지만, 팝아트의 장르적 의도를 넘어서 인간의 복합적 감정, 여성적 감정의 연출성 등을 보여주는 심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익사하는 여자’(Drowning Girl)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으로 만화 특유의 표현을 회화로 극대화했다
대중문화와 순수미술 경계 허물다
어릴 때부터 과학과 만화책에 관심을 보이던 리히텐슈타인은 십대 때부터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대학에서 10여 년간 미술을 가르쳤다.
평범한 화가이자 교육가였던 그의 스타일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미키 마우스 만화책을 보다가 "아빠는 이만큼 잘 그리지 못할 걸!" 하고 말했다. 이후 그는 당시 저급하다고 여겨지던 만화책이나 상품 광고 이미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대중문화 이미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의 특징을 직접 반영하며 현대 사회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시각적 자료를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명확한 선, 단순한 형태, 대비되는 색채는 그래픽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브랜드 디자인, 제품 광고,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다.
그는 미술이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좋아하고 향유(享有) 가능한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미술관에 대한 거부감 없앴고, 예술을 즐기는 것으로 만들었다.
리히텐슈타인은 단순히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인 예술가라는 평가를 넘어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관념과 경계를 허문 작가였다. 소비사회와 대중매체의 본질을 탐구한 혁신적인 예술가로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행복한 눈물’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지난 2008년 삼성그룹 비자금 관련 의혹 때문이었다. 경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 작품이 대중에 공개됐다. 조사 결과 삼성그룹 미술품 컬렉션 일환으로 구입된 것으로 밝혀져 혐의를 벗게 됐다. 가로 세로 96.5㎝인 ‘행복한 눈물’은 당시 가격 1000만~180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은 현재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