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기의 듣는 인간 Homo Auditus] (87) 한숨소리
한숨은 길고 깊게 내쉬는 숨이다. 한숨을 듣고 그 곡절까지 짐작할 수 있는 자라면, 그는 생(生)의 심연을 헤아릴 수 있는 자이다.
한숨 듣기는 경륜을 요청한다. 길게 살았다고만 해서 그의 한숨이 내게로 오지는 않는다. 한 줌의 한숨을 헤아리기 위해 독서도 필요하고, 여행도 중요하고, 봉사적 참여도 해야 한다.
고단한 인생에서 한숨은 눈물과 동행하는 기호(記號)로 묶이지만, 그것의 해독(解讀)은 만만치 않다.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눈물이 마른 곳에 한숨이 터져 나오고, 한숨이 꺼진 뒤에 눈물이 흐르는 것, 그것이 인생 무대 아니었던가. 진짜 극한의 비창(悲愴)에는 한숨조차도 없다. 한때 한숨과 눈물은 신파극 대사의 단골 메뉴가 되면서 인생 해석의 단조로움을 자초하지 않았던가.
한숨은 짧은 듯해도 말로 담을 수 없는 깊고 진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슬픔·피로·불안·우울·체념·안도·후회·기대 등에 결부되는 감정이 한숨에 들어 있다. 그래서 한숨은, 비록 음운의 언어로 토해지지는 않지만, 언어의 위상을 차지한다. 아니,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word beyond word)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한숨도 구체적 언어로 터져 나온다. 실제 한숨이 그렇다기보다는 한숨을 문자부호로 표기하는 경우가 온라인상에서 늘어난다. 감정을 담아 내쉬는 한숨을 휴우·어휴·에휴·으휴·하아 등으로 표기하여, 주로 SNS상에서 사용한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 한숨 소리를 들으면, 복이 나간다고 꾸중했다. 좌절과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토해내는 것이 한숨이라면, 한숨은 그런 무의식을 의식 위로 띄워 올려 그걸 양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부정적 자아가 강화되는 한숨은, 듣는 족족 말려야 함이 마땅하다. 어찌 아이들 한숨만 그러하겠는가. 어른의 한숨인들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은 한숨이 늘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