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작가] 게오르그 짐멜 ‘돈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

'완벽한 돈'을 찾아...125년 전에 이미 '스테이블코인' 예측

2025-07-31     박석근 작가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1858-1918)의 ‘돈의 철학’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900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없는 돈’ 즉 현대의 암호화폐 스테이블코인(stablecoin)과 관련해 깊은 통찰력을 보인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에 연동(pegged)해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디지털 자산으로, 결제·송금 등 디지털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스테이블코인이 일상화될 때 과연 돈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인간은 돈으로부터 자유워질까.

'돈의 철학' 외국 출간본.

돈, 거래수단에서 점차 목적으로

‘돈의 철학’은 화폐의 기술적 혁신이나 유통, 돈의 기능이 날이 갈수록 강화되는 현상을 예측해 심층 분석한다. 짐멜의 연구 대상인 돈은 경제학을 넘어 문화적·철학적·심리적·사회적 현상이다.

돈은 거래의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현대사회에서 돈은 실재라기보다 하나의 추상이다. 가치를 정하는 실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는 추상물이다.

돈은 단순한 경제적 도구나 실물의 가치를 넘어 인간의 상호작용과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형성하는 매개체다. 5만 원권 지폐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만 다른 것과 교환이 가능하다고 서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돈은 사회적 신뢰에 기반한다.

짐멜은 돈이 거래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는 돈을 향한 무한 욕구로 연결됐고, 인간의 삶이 돈의 지배 아래 놓이는 가치전도 현상을 낳았다.

모든 거래가 돈을 통해 가능해진다면 물건의 가치는 가격표로 평준화된다. 상품의 가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유대감이 아니라 냉혹하고 비인격적인 거래가 지배한다. 상품은 그것을 생산한 노동자의 개성으로부터 분리되고 마침내 전통적 사회구조를 재구성한다. 돈을 좇는 개인은 사회공동체로부터 점점 고립되지만, 역설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 긴밀히 연결되는 사회가 된다.

'돈의 철학' 국내 출간본.

125년 전에 디지털 화폐로 진화 예측

짐멜이 지적한 돈의 추상화는 오늘날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직면해 깊은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놀라운 건 이미 125년 전에 돈이 어떤 실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지점까지 진화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개념은 125년 전 짐멜이 예측한 ‘완벽한 돈’에 가깝다. 가치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오직 교환만 하는 추상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디지털 코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짐멜이 말하는 완벽한 돈은 그 자체로 아무런 고유한 가치도 목적도 없으며 오직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

법정 화폐를 담보한 스테이블코인은 물리적 형태가 없으며, 그 가치는 중앙은행 등 국가기관이 보유한 준비금에 의해 유지된다. 이는 짐멜이 말한 ‘돈의 비(非)물질화’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승패는 안정적인 가치 유지에 달려있고, 이는 짐멜이 제시한 안정적인 돈의 개념과 일치한다.

게오르그 짐멜.

스테이블 코인은 불안하고 불완전

짐멜은 돈을 사회에 대한 청구권으로 정의하면서 화폐 시스템이 반드시 사회의 신뢰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정화폐를 담보한 스테이블코인 경우, 사용자는 국가금융기관이 충분한 준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약속을 신뢰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짐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돈의 가치가 단순히 물질적 기반이 아니라 이를 보증하는 국가와 사회의 제도적 약속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는 발행사의 투명성 부족이나 준비금 부족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스테이블코인이나 비트 코인 등 디지털 화폐는 알고리즘을 통해 탈중앙화 방식으로 안정성을 유지하려 한다. 이는 국가기관 개입 없이 돈의 가치를 보증하려는 시도로, 짐멜이 언급한 ‘비(非)국가적 형태의 돈’의 성장이다. 이런 시스템은 기술적 결함이나 시장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해 언제라도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결국 짐멜은 ‘안정적인 돈’이란 이상적인 사회질서 속에서만 가능한 돈이라고 통찰했다. 이상적 사회란 돈과 상품 간의 균형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유지되는 공간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완벽한 돈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짐멜의 관점에서 볼 때 불완전한 면이 있다. 그의 관점대로, 오늘날 암호화폐는 불법 거래에 사용될 뿐 아니라 대중의 보편적인 접근 또한 어렵다. 이러한 현실은 돈의 진화와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익명화·자동화로 유대·신뢰 약화

돈은 사람을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만든다. 짐멜은 돈은 사람들을 구시대적 속박에서 해방시키지만, 반대로 화폐 시스템에 대한 의존성을 더욱 높인다고 봤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을 넘나들며 빠르고 효율적인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등 자유를 안겨주지만 특정 플랫폼이나 알고리즘에 의존하게 만든다. 짐멜이 예측한 대로 스테이블코인 등장은 가치의 수량화와 추상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고, 이에 따라 공동체는 새로운 형태의 취약성과 통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거래의 익명성은 더욱 심화되고, 사회에 대한 개인들의 권태로운 태도는 한층 확대될 것이다.

돈의 기술적 진보는 필연코 사회의 불완전, 신뢰의 복잡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스테이블코인은 담보자산(달러)에 고정된 가치를 표방하지만 그것에 대한 신뢰는 알고리즘, 민간기업, 혹은 블록체인 기술과 시스템에 의존한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신뢰 기반이 국가나 사회공동체가 아닌 민간 기업에 전가될 경우 사적 이익이 공적 신뢰를 대체할 위험에 직면한다. 거래 주체는 익명화되고 관계는 코드로 자동화되며 사회구성원 간의 유대와 신뢰는 더 약화된다. 거래 시스템이 국가통제와 통화체계 밖에서 작동되면서 주권은 마침내 붕괴된다.

짐멜의 ‘돈의 철학’은 돈이 인간 존재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이제 사람들은 국가와 중앙은행이 아닌 디지털 알고리즘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를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유로워졌는가, 아니면 더 예속되었는가? 

돈이 없었던 돈의 철학자

짐멜은 오랫동안 비주류 이단 철학자로 취급됐다. 교수 임용에서 배제되어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생애 말기에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 정교수가 됐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그의 저서 ‘돈의 철학’은 금융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고 20세기 사회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짐멜은 돈의 본질을 가장 깊이 꿰뚫어보았으나, 아이러니하게 돈이 가장 없었던 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