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도의 겨자씨 복음행전을 전하는 이야기
역사에는 이야기가 있다. 강화도는 조선 말기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주변 나라부터 서구 열강의 침략까지 고난의 역사를 버텨낸 강화도에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진실을 말하고 있다.
강화도는 지리상으로 수도인 한성(서울)과 가깝고 임진강과 한강, 예성강의 바다 쪽 출구를 막는 중요한 요충이기 때문에 민족적 시련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러나 이 아픔의 흔적들은 현재를 보는 이들에게 과거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1884년 6월 24일에 맥클레이 선교사, 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 1885년 4월 5일 아펜절러 선교사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 1885년 5월 3일 스크랜튼 선교사들은 1883년 개항한 제물포항으로 입국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선교사들이 진리의 큰 빛,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고난과 핍박의 순간에도 민족에게 구원의 안식처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하였다. 선교사 입국을 기념하고 복음의 물결이 온 나라와 바다 건너 땅끝까지 파도치기를 소망하면서 선교백주년기념탑을 세웠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에 한국 최초의 감리교인 인천 내리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이후 1892년에 23세의 존스 선교사가 담임을 하였고 1901년 한국인 최초로 김기범 목사가 안수를 받고 1904년 이후에 내리교회를 담임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열정에 힘입어 내리교회는 기도하면서 예수를 전하고 있었다. 전도차원으로 한 상조계모임에 50여명이 모여졌다. 하지만 어느 날 계주의 곗돈 횡령사건으로 상조계는 와해가 되었다. 그래도 계원 중 2명이 남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이승환이었다.
강화도가 고향인 그는 인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고 있었다. 돈도 벌고 먹고 살만해졌으나 마음의 평안이 없기에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존스 선교사를 만나면서 내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고향 마을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이승환은 믿음의 삶을 위하여 주막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강화도에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입성이 거절되었던 존스 선교사 대신 생명의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열정은 인천과 강화도 북서쪽 해안 양사면 시루미 마을 변두리에 있는 곳에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자기 열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되어 진다는 것이다.
조선 말, 당시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사회적 약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의 능력은 핍박과 시련의 연단을 거쳐서 우리나라 평민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분을 극복하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믿음과 삶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강화 시루미 마을 출신 이승환이 효도를 하려는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어머니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존스 선교사는 성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승환은 밤에 병환 중인 어머니를 약속된 장소로 업고 갔다. 그리하여 보름달이 뜬 늦은 밤, 강화도 앞바다 작은 배 선상에서 존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강화도 최초 세례자가 되었다. 신앙의 역사에서 보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 순례는 개인마다 변화를 가져다준다.
김상임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양반으로 존스 선교사와 이승환에게 우리 땅을 밟고 가면 불태워 없애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핍박의 모델 사울과 같은 그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
그 복음의 불씨가 확산이 되었고 132년의 역사를 간직한 교산교회가 강화도 처음으로 설립이 되었다. 교회 앞에는 강화복음전례기념비와 선상 세례의 기념 조형물 작품을 볼 수가 있다. 동서남북으로 작은 산들과 논과 답이 정겹게 다가온다. 지금도 교산교회는 6대의 신앙을 이어 받은 후손들이 직분자로 나와 선산의 비석들에 의해 발길을 찾은 순례객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유학자 출신 다리목 마을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에게 말씀으로 신앙훈련을 받고 강화도 예루살렘 교산교회 전도사로 섬기게 되었다. 강화도 최초의 전도사가 된 그의 개종은 그 지역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의 아들 김흥제는 4대 목사로 목회를 감당하였다. 1893년에 설립된 교산교회는 일제강점기에도 신앙을 지키는 믿음의 동역자가 많았다. 그리고 30여명의 목회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교산교회의 자랑스러운 강화 행전이야기는 잠자고 있던 그곳에 부흥의 역사를 살리는 증인으로 현시대에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인생의 터전에서는 한 사람이 중요하다. 아펜젤러 선교사를 이어 존스 선교사 그리고 이승환 권사의 신앙은 시루미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나중에 김상임 전도사로 이어지는 겨자씨 복음 행전의 열매로 교산교회가 탄생되었다.
신앙의 역사를 품은 강화도는 지금도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헌신과 사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복음의 불모지 땅 강화에 떨어진 불씨는 현재 불꽃이 되어 성령의 강화 복음행전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복된 자리 생명과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정한 의미를 두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