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영·이영애, 같은 원작 다른 연기...두 명의 '헤다'가 온다
국립극단·LG아트센터 '헤다 가블러' 무대
연극계에 생소한 일이 벌어졌다. 배우 이혜영과 이영애가 같은 시기에 같은 연극을 다른 곳에서 공연하는 것이다. 두 배우가 선택한 작품은 ‘여자 햄릿’이라 일컬어지는 연극 ‘헤다 가블러’다. 이혜영은 국립극단, 이영애는 LG아트센터 25주년 기념 무대에 각각 오른다. 135년 전 쓰인 이 작품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두 배우가 선택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여성의 자유로움에 주목
‘헤다 가블러’는 노르웨이 문호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이 1890년에 쓴 희곡이다. ‘인형의 집’에 이은 그의 대표작으로 19세기에 쓰여졌음에도 현대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입센은 주인공 헤다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통해 사회적 구속과 압박 아래 독립을 열망하는 여성의 내면에 주목한다.
아름답고 당당한 헤다는 학문밖에 모르는 조지 테스만과 결혼 후 지루한 일상에 권태를 느낀다. 그러던 중 과거의 연인이자 불운한 천재 작가였던 에일레트가 재기에 성공해 나타난다. 헤다는 에일레트의 성공 뒤에 자신이 무시하던 동문 테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헤다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 헤다의 심리를 꿰뚫은 브라크 판사까지 얽히면서 그녀의 삶은 점점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는다.
‘헤다 가블러’는 약 2시간 30분 동안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여러 감정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135년 전 쓰인 고전이지만, 2025년인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다.
한국의 첫 헤다 vs 새로운 헤다
헤다는 존경받는 장군의 딸로 외면은 우아하지만 내면에는 불안과 욕망, 파괴적인 본성을 가진 인물이다. 다채로운 캐릭터인 헤다는 여배우들이 꼭 한 번 연기해 보고 싶은 캐릭터로 꼽힌다. 남자 배우들의 로망이 ‘리어왕’, ‘햄릿’인 것과 마찬가지다.
‘헤다 가블러’는 13년 전인 2012년 국립극단이 국내 초연했다. 파격적인 연출과 스토리로 전 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타이틀 롤인 헤다를 연기한 이혜영은 제5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연기상과 제49회 동아연극상 연자인기상을 받았다. 한국식 헤다의 기준을 세운 배우가 이혜영인 것이다.
이혜영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파과’에 나이든 킬러로 등장해 ‘백발의 존재감’을 뽐냈다. 관련해 출연한 신동엽의 유튜브 채널에서 신동엽이 ‘헤다’ 보러 가겠다고 하자 "벌써 매진됐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LG아트센터 25주년 기념 ‘헤다 가블러’에 출연하는 이영애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시절부터 "연극을 한다면 ‘헤다 가블러’를 하고 싶다"고 콕 집어 말했을 정도로 이 작품 출연을 염원해 왔단다. 결국 1993년 연극 ‘짜장면’ 이후 32년 만의 연극무대 복귀작으로 선택했다. 이영애는 "50대가 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배우로서 다양한 감정을 쏟아낼 수 있겠다 싶어 출연을 수락했다"고 했다.
원작은 같지만 각색은 달라
현대 연극의 아버지, 근대극의 일인자로 불리는 입센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다. 대표작 ‘인형의 집’ ‘들오리’ ‘페르귄트’ 등은 지금까지도 세계 무대에 끊임없이 올려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시대를 거치며 다양하게 해석됐다. ‘헤다 가블러’ 역시 시대와 문화를 넘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각색본은 리처드 이어(Richard Eyre) 작품이다. 그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연극 연출가이자 영화·드라마·오페라 감독으로 ‘헤다 가블러’로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리바이벌상과 토니상 등을 수상했다.
국립극단과 LG아트센터는 같은 시기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만, 각각 다른 스타일의 극본을 선택했다.
국립극단은 정통 방식을 선택, 입센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온 배재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조태준 교수의 번역본을 사용한다. 원작의 특징인 노르웨이 상류사회의 계급 구조와 성 역할이 그대로 담겼다.
LG 아트센터는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을 선택했다. 이어의 각본은 헤다의 감정과 선택에 더욱 주목, 폭발적인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포인트다.
135년 전 작품에 2025년식 연출
배우에 이어 연출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박정희 연출은 국립극단의 예술감독 부임 후 데뷔작이다. "초연 당시와 비교해 사회와 관객의 감수성이 달라졌다"며 연출의 변화를 드러냈다. LG아트센터 전인천 연출은 "현대인의 불안과 욕망을 잘 담아내 2025년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다.
두 연출가의 비전은 무대 디자인에서도 뚜렷하게 대비된다. 박상봉이 디자인한 LG아트센터 무대는 거대하면서도 미니멀한 무채색의 기하학적 공간으로 구성됐다.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구조는 헤다가 갇힌 집이자, 그녀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국립극장은 드라마틱한 연출에 주목한다. 초연에서는 웅장하고 클래식한 시대적 배경을 구현했다면, 2025년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를 위태롭게 오가는 인간 헤다의 추락에 주목한다. 무대는 몽환적이고 섬광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두 작품 모두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이 아닌 이혜영/이영애 원 캐스팅으로 진행된다. 이영애의 헤다는 공연을 시작, 6월 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시그니처홀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혜영의 헤다는 원래 예정됐던 개막이 조금 미뤄져 5월 16부터 6월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린다.
최근 몇 년 새 스크린에서 활약하던 배우들이 연극무대를 새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다. 전도연의 ‘벚꽃동산’이 그랬고, ‘파우스트’ 박해수, ‘나무 위의 군대’ 손석구, ‘리처드 3세’ 황정민 등이 대표적이다. 배우들이 입을 모아 연극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배우의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는 장이기 때문이다.
공연 관계자의 말은 또 다르다. OTT로 인해 미개봉 또는 미편성 작품이 늘면서 배우들 촬영이 줄어든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OTT를 통해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져 K-연극, 뮤지컬에 대한 외국인 팬덤이 늘고 그 결과 작품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OTT 덕분에 공연계의 새로운 시장이 구축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