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생식력 조절 '스위치' 찾았다...불임 치료 개발 새 희망
인간의 생식 과정은 단순한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아니다. 특히 정자의 여정은 치밀하게 설계된 ‘생체 탐색 미션’에 가깝다. 과학자들이 이러한 미션의 비밀이 ‘온도’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번 연구결과는 불임 부부의 임신 가능성 제고는 물론 임신을 원치 않는 부부와 연인들을 위한 차세대 남성 피임약 개발의 새장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 의대 폴리나 리슈코 교수팀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한 논문에서 정자에는 온도에 반응하는 열 활성화 스위치가 있으며, 이것이 생식 능력을 결정하는 핵심 열쇠일 수 있다고 밝혔다.
포유류의 정자는 정상 체온보다 낮은 약 33.5℃의 온도 조건을 선호한다. 대다수 수컷 포유류의 음낭이 체외에 돌출돼 있는 것도 이를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정자가 수정에 성공하려면 체온보다 높은 38℃ 이상의 암컷 생식기관 내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이때 정자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암컷의 생식기관에 들어간 정자는 일명 ‘과활성화((hyperactivation)’ 상태로 변해 운동성이 촉진되는 것이다.
리슈코 교수는 "겉으론 정상으로 보이는 정자라도 과활성화 능력이 부족하면 난자에 도달하기 위한 힘과 민첩성이 부족해 불임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과활성화는 ‘캣스퍼(CatSper)’ 단백질에 의해 발동된다. 정자의 꼬리 부분에 위치한 이 단백질은 칼슘 이온 채널(통로)의 역할을 하며, 채널이 열려 칼슘 이온이 유입되면 한층 파워풀한 꼬리운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지금껏 캣스퍼가 어떻게,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남성과 여성 생식기의 환경, 즉 호르몬과 산성도(pH) 차이를 원인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리슈코 교수팀은 이번 연구에서 캣스퍼의 칼슘 이온 채널을 켜는 정확한 스위치가 온도라는 것을 찾아냈다.
연구팀은 정밀 전기생리학 장비를 이용해 생쥐 정자의 이온 흐름을 실시간 측정했다. 그 결과, 캣스퍼의 이온 채널은 33.5℃ 이상에서만 열렸다. 온도가 1℃만 올라도 활동성이 눈에 띄게 향상됐으며, 여성 생식기와 같은 38℃를 초과할 때 뚜렷한 과활성화 급등이 나타났다. 정자는 섬세하게 설정된 온도계를 내장한 일종의 생체 기계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구팀은 이온 채널이 너무 일찍 열러 난자에 도달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도록 해주는 안전장치까지 발견했다. 정액 속에 들어있는 천연 유기 화합물 ‘스퍼민(spermine)’이 그 주인공이다.
전립선에서 분비되는 스퍼민은 캣스퍼의 온도 반응성을 차단하는 ‘역가역적 조절자’다. 캣스퍼의 열 반응을 일시 차단해 정자가 고환 내부나 사정 직후 정액 속에 있을 때 과활성화를 막아준다. 이후 정자가 여성의 생식기관에 진입하면서 스퍼민 농도가 낮아져야 캣스퍼는 온도에 반응하게 된다.
리슈코 박사는 "이번 연구를 통해 정자가 환경을 감지하고, 정밀하게 운동 상태를 전환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점을 분자 수준에서 입증했다"며 "캣스퍼의 온도 민감성은 정자 기능 조절을 통한 불임 치료뿐 아니라 남성 피임에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예컨데 불임의 원인이 정자의 낮은 활동성에 있다면 캣스퍼를 보충해 임신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반대로 피임을 원할 경우 캣스퍼를 조기 활성화해 난자에 도달할 힘을 빼앗아 버리는 방식으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캣스퍼 기반 기술은 인공수정이나 호르몬 피임약 대비 뛰어난 장점을 가진다. 캣스퍼는 정자에만 존재하는 만큼 이를 표적으로 삼는다면 고통스러운 시술이 필요 없고, 인체의 다른 기능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 매우 안전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리슈코 교수는 "자연은 정자가 완벽한 시기에 수정될 준비가 돼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름답게 정밀한 시스템을 진화시켜 왔다"며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이 중요한 단계를 더 잘 이해하고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