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세계] 교수 스파이 정수일과 로열 스파이 블런트
"북한이 중동 외교에 써먹었다면 S급 인재" "진짜 희대의 천재 학자였는데 북한이 진가를 못 알아보고 간첩으로밖에 못 쓴 거지" "학문적인 성취를 이룬 점은 있겠지만 생전에 간첩 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오점이 될 것이다" "간첩은 교수가 됐고 교수는 간첩이 되는 이상한 세상이네."
‘무함마드 깐수’로 유명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의 부고 기사에 달린 네티즌들의 댓글이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정곡을 찌르고, 냉소적이면서도 날카롭다. 2월 25일 91세로 별세한 위장간첩 정수일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단이다.
상가에 다녀왔다는 어느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수일의 파란만장한 삶을 글로 쓰고 싶다고 했다. 12개국 언어에 능통하고, 실크로드 연구와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가 어떻게 간첩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화를 받던 필자에게 문득 앤서니 블런트가 떠 올랐다. 한국에 정수일이 있다면 영국엔 앤서니 블런트가 있었다.
블런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친척인 로열 패밀리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5개 국어까지 하는 우아하고 교양있는 남자였다. 그는 런던대학 코볼트 예술학교의 가장 존경받는 교수였다. 20세기 영국의 가장 유명한 미술사가이기도 했다. 1979년 11월, 대처 수상이 블런트의 스파이 활동을 공개했다. 블런트는 1930년대에 이미 KGB에 포섭되었던 소련의 스파이였다.
2022년, 정수일이 미수(米壽, 88세)를 맞아 <시대인, 소명을 따르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시대의 소명에 따라 살아온 시대인’이라고 자평했다.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도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없다’라며 자신의 굴곡진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는 회고록의 많은 부분을 ‘통일 문제’에 할애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스파이 활동’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확정판결까지 나온 사안이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회고록에 담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2009년, 사후 25년 만에 블런트의 회고록이 공개됐다. ‘당시 정치적으로 너무 순진해서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라며 스파이 활동의 동기와 배경만 구구절절 언급했다. 스파이 활동의 구체적 내용은 없었다. 그저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만 했다. 블런트 역시 자신의 스파이 활동으로 고통받았을 사람들에 대한 사과는 회고록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스파이 활동 결과에 대해서도 무책임했다.
정수일은 평양외국어대학 아랍어 교수로 근무하던 중 북한 노동당 연락부에 소환되면서 스파이가 됐다. 암호사용법, 사격훈련 등 4년 5개월의 강도 높은 스파이 훈련을 받았다. 레바논·튀니지·호주·인도네시아·파푸아뉴기니·말레이시아·필리핀을 거치는 5년 4개월의 집요한 국적 세탁과정을 거쳤다. 그의 스파이 활동은 노동당 요구와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체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체제 간첩이었다.
블런트는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고, 이념적 확신을 바탕으로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개인적 신념을 이유로 공산주의에 헌신한 ‘이념적 스파이’였다.
블런트와 정수일!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블런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가족이 없었다. 정수일은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남한에도 아내가 있었다. 블런트와 정수일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가족이 있는 스파이와 없는 스파이. 그들의 선택과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