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작가]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Le Bouc Emissaire)

잔혹한 희생양 만들기...그 배후엔 정치권력의 '설계'가 있었다

2025-04-03     박석근 작가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는 1982년작 <희생양>에서 폭력을 단순히 개인의 공격성을 넘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으로 분석한다. 지라르는 폭력의 기원을 탐구하며 그것이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재생산되고 조절되는지를 설명한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 르네 지라르. 

‘희생양’의 키워드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할 뿐이다. 갈등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에서 비롯되며 그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한다. 희생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사회구조적 현상이다.

희생양이 설정되면 인간들은 공동의 적을 향해 결속한다. 폭력이 확산되고 사회는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그를 제거함으로써 안정을 되찾는다.

역사적으로 많은 희생양이 있었다. 소크라테스, 예수, 중세시대 마녀가 그 대표적인 예다. 희생양은 처음에는 모두의 분노를 유발하지만, 후에는 신성한 존재로 추앙되기도 한다.

예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폭로한 최초의 인물이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가 더 이상 희생양을 만들지 않게 하는 표징이다. 지구상에 명멸한 많은 종교들이 희생양에 의한 폭력을 은폐했지만, 기독교는 이를 폭로하고 해체했다.

정치적 폭력과 희생양 메커니즘

르네 지라르는 인류학·문학·신학·역사학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그의 철학은 현대사회의 갈등과 정치현상을 해석하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지라르 이론에 따르면 정치적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충돌을 넘어 집단적 적대감, 선동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정치적 폭력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내부 결속을 다지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선거전략, 권력 유지, 언론 프레임, 온라인 여론 조작 등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정치적 지도자나 정당은 자신들의 욕망을 국민의 욕망과 동일시하려 하고, 이를 위해 상대 정파를 악마화하며 갈등을 조장한다. 정쟁이 격화되면 집단 내 분노가 확산되면서 정파가 다른 상대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인식한다. 국민의 감정은 격해지고 폭력적 해결 방식이 등장한다. 시위·테러·가짜뉴스·언론 조작·법적 탄압이 난무한다.

정치권력은 국민의 분노를 특정 대상에게 돌리고 희생양을 설정해 국민의 분노를 한곳에 집중시킨다. 희생양이 된 개인 또는 집단은 탄압당하며 때로는 물리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 그린 '하나님의 어린 양'.

특정 집단 혐오의 배후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치적 폭력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선동이 일어날 때 누가 희생양으로 설정되고 있는가를 자각해야 한다. 또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조장될 때 그 배후의 정치적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 갈등이 곧 적대적 감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 진영도 똑같은 미메시스(mimesis) 욕망 속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공동체의 폭력은 단순한 힘의 충돌이 아니라 희생양을 설정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사회적 정치 메커니즘에서 비롯된다.

정치 지도자들은 위기를 이용해 국민의 불만을 특정 집단으로 돌리고,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 국민들이 이에 동조하는 순간 희생양 메커니즘은 작동되며, 사회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한다.

지라르 사상 기초는 모방적 욕망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난 르네 지라르는 처음부터 철학을 연구한 게 아니었다. 그는 먼저 역사학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중세역사와 고문서를 공부했지만 철학이나 인류학에 관심이 특별했던 건 아니었다. 그는 24세 때 미국 유학을 떠나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연구했다. 프랑스 태생이었지만 사상적 기반이 전혀 다른 미국에서 다양한 학문을 접했고, 이것이 그의 사상을 독창적으로 만든 계기가 됐다.

지라르는 스탕달·도스토옙스키·프루스트 등의 작품을 분석했고 그 과정에서 ‘모방의 욕망’ 개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은 단순히 개인적 욕망을 뒤쫓는 게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뒤쫓는다는 중요한 통찰이었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은 그 외양만 다를 뿐, 각자의 욕망을 따라하며 경쟁하고 갈등과 폭력이 발생하는 패턴을 발견한 것이다.

지라르는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961년에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Deceit, Desire, and the Novel)을 발표했다. 지라르는 이 책에서 인간 욕망의 본질을 ‘모방적 욕망’ 개념으로 설명했고, 이 이론은 그의 모든 사상의 기초가 됐다.

문학연구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신화 속 인신공양은 실제 살인

지라르는 단순한 문학연구에서 벗어나 인류학과 종교 연구로 관심을 확장했다. 중세 유럽의 박해와 종교적 희생양 현상에 관심을 두고 이를 분석하면서 욕망이론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세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폭력과 갈등이 마녀 희생양에게 집중되며 해결되는 현상과 구조를 발견했다. 이것을 심화·연구해 <폭력과 성스러움>(Violence and the Sacred)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사회가 희생양을 설정함으로써 집단 내 갈등을 해소하고 또 희생양이 신성시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인신공양이 행해진 종교의식과 신화가 실제사건이었고 주장했다. 즉 신화 속 인신공양은 실제로 일어난 살인이었고, 인류의 문명화 과정에서 인신공양은 양이나 소 등의 가축으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희생양 효과는 살인과 같이 잔인할수록 갈등해소 효과가 크고, 그렇기 때문에 고대사회에서는 인신공양이 공공연히 행해졌다고 주장했다. 지라르는 이 이론을 기독교와 성경 해석에 적용했고, 결국 기독교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종교라 정의했다.

예수 희생은 희생양 폭로 사건

1980년대 이후 지라르는 신학적 사상가로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종교라고 보았다. 즉 죄 없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가 더 이상 희생양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해석했다. 예수의 희생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사건이었으며, 성경 속 이야기들은 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지라르의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신학계뿐만 아니라 철학과 인류학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현대사회의 폭력문제 연구

르네 지라르는 2005년에 프랑스 학술원(Academie francaise) 회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존슨 홉킨스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현대사회의 폭력 문제를 연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