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의 국적

2025-03-12     홍승기 변호사·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홍승기

<반일종족의 역사 내란>을 읽다가 이영훈 선생이 쓴 ‘머리말’을 펼쳤다. 마지막 문장에서 콧잔등이 시큰했다. "이 책을 반일 종족의 무분별한 역사 공세를 굳건하게 견뎌낸 외우 김문수 군에게 바친다."

김문수 장관은 대통령이 불법구금된 시기에 참모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모범답안을 보여주었고, 민주당 의원들의 유치찬란한 국적 공세에도 든든하게 버텼다.

조선인의 일제시대 국적은, 그가 독립운동가이든 시정잡배이든, 일본이다. 일본 국적법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으니 조선인은 일본 국적자가 아니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국적은 국적법의 적용으로 ‘창설’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적법은 1948년 12월 20일 제정되어 당일 시행됐다. 대한민국이 성립한 1948년 8월 15일부터 국적법이 시행될 때까지, 우리는 무국적자가 아니었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은 ‘완전한 통치권’을 일본에 넘겼다. 대한제국 국민은 8월 29일 병합조약이 발효함으로써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 국민이 됐다.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1923년 7월 중국에 귀화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은 프랑스 영사관 협조로 프랑스 조계에서 안창호를 체포했다. 상해변호사회가 세 번씩이나 성명을 발표하며 중국인에 대한 불법 구금이라고 성토했으나 일본은 안창호가 일본인이라고 버텼다. 조선왕조의 관습과 1908년 대한제국 내부대신 훈령 제240호가 조선인의 외국 귀화를 금지한다는 이유였다.

일본 국적법은 국적이탈을 허용했다. 일제는 대만인에게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적용을 피했다. 중국과 극동에서 생활하던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1934년경 프랑스 영사관은 ‘민족주의혁명파’ 조선인 83명 중 32명이 중국 귀화자라고 분석했다. 이시영·이동녕·양기탁·엄항섭·송병조·안공근 등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이 83명 중에는 임시정부 요인이 38명쯤 되고 그들 중에도 중국 귀화자가 28명쯤 확인된다.

일제시대 조선인 국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가의 중국 귀화에 대해서도 흥분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고도 싶었고 중국에서 생활인으로 살아야 했다. 어찌어찌 미국 땅으로 건너간 우리 국민들이 현지에서 영주권 ·시민권을 얻기 위해 들이는 노력보다 더 간절했을 수도 있다. 불행했던 그 시절의 한 가닥 ‘사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