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칼럼] 봉준호 감독 영화 ‘미키 17’이 불편한 이유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SF영화 ‘미키 17’이 화제다. 개봉 4일 만에 누적 관객수 130만 명을 돌파하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봉 감독의 인지도와 마크 러팔로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했다는 요인들만으로도 충분한 동력이다. 봉 감독 연출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인 1억2000만 달러(약 1710억 원)이 투입될 정도로 할리우드에서도 기대가 크다.
그의 최대 흥행작인 ‘괴물’의 1300만과 ‘기생충’이 기록한 1000만 관객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맞지만 봉준호의 세계관이 영화 속에 지나치게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영화 장르이지만 분명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미키 17’은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기반으로 각색한 영화다. 원작은 공상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지만, 봉 감독 특유의 정치·사회적 풍자로 재탄생시켰다. 소재는 원작에서 빌려왔지만 사실상 봉 감독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디스토피아의 클리세 격인 환경 파괴로 인한 지구 멸망으로 시작된다. 복제인간 소재의 기존 영화들과 차별점은 복제인간이 다시 프린트되어 태어나는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익스펜더블은 무제한 찍어내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처럼 유일해야 한다. 미키 1, 미키 2… 이런 식으로 미키가 죽으면 다음 순번의 미키를 찍어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착오로 미키가 중복 생산되면서부터 봉 감독의 진짜 스토리는 시작된다.
‘미키 17’에는 ‘기생충’에서 말하는 사회적 불평등과 주로 좌파진영에서 최우선시 하는 환경·여성·노동·평화 등이 전체적으로 녹아 있다. 그의 영화는 항상 PC지향적이었기 때문에 SF영화 형식을 빌렸다고 해서 다르지 않다. 생산성을 앞세워 무한적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미키를 통해 자본가를 비판하고, 인종의 타자화를 통해 서구 식민주의를 비판한다. 유리 천장에 총을 난사한 여성요원은 그 파편더미로 사망한다. 이렇게 영화 중간중간 수많은 메타포를 배치함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사회 정의를 은유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함으로써 사회적으로도 외면 받는 한물간 PC주의적 요소들이다. ‘깨어 있는 사람’의 기준이 이제는 반대가 됐다. 봉 감독 영화 속 메시지가 너무도 진부하고 올드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껍데기만 할리우드식으로 폼나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세계관에 변화를 줄 때가 됐다.
이번 영화에서 특히 불편한 건 봉 감독이 추구하는 정치제도적 시각이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려는 우주선의 원수 케네스 마샬이라는 캐릭터에 투영돼 있다. 자신은 호화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구성원들은 철저히 통제시킨다. 악당 같은 독재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에 관해 봉 감독은 "마샬은 과거 독재자들 모습을 따와서 만든 캐릭터이며,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현재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영화 속 독재자 모티브가 트럼프 대통령과 윤 대통령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존재한다. 더군다나 그가 한 인터뷰를 통해 "2024년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 이 영화의 장면과 꽤 비슷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케네스 마샬의 독단적인 지시로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데, 그래서 그 어떤 사건이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추측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12·3 계엄령 뉴스를 들은 마샬 역의 마크 러팔로가 이메일로 안부를 묻자, 봉 감독은 ‘걱정하지 말라, 괜찮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실제 아무 일도 없었던 비상계엄과 도대체 뭐가 비슷했는지 의문이다.
케네스 마샬의 1인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적으로 새로운 위원회가 선출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백인 남성으로 상징된 독재자는 사라지고, 흑인 여성이 위원회 지도자가 된다. 마치 대통령제의 폐단으로 의회가 중심이 되는 내각제를 연상시킨다. 구시대적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이 증명하고 있지 않나. 대통령제 국가에서도 의회 독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