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세계] 스파이는 롤렉스를 좋아한다
오메가·브라이틀링·세이코·롤렉스….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서 착용했던 시계들이다. 모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하는 고급 시계들이다. 스파이들은 영화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고가의 손목시계를 좋아했다. 냉전 시대 CIA 공작관들은 작전에 투입되기 전 군부대 매점(PX)에서 면세로 롤렉스를 구입했다.
CIA는 신분 노출 위험이 있는 지역이나 탈출 경로가 제한된 지역에서 활동할 때 롤렉스를 ‘뇌물’로 사용됐다. CIA의 롤렉스는 전투기가 적지에서 격추됐을 때 조종사들의 탈출과 생존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공군의 ‘E&E(Excape & Evasion) 물물교환 상자’와 유사한 기능을 했다.
동독에 수감됐던 공작관이 롤렉스를 뇌물로 주고 탈옥에 성공했다는 소설 같은 무용담, 베트남에 잔류했던 요원이 롤렉스와 비행기표를 맞바꿔 극적으로 사이공을 탈출했다는 영화 같은 일화, 롤렉스와 맞바꾼 식량으로 적지에서 일주일을 버텼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CIA 요원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E&E 물물교환 상자에는 20프랑과 10프랑짜리 프랑스 금화 각 1개, 1파운드와 1/2파운드짜리 영국 금화 각 1개와 2개, 금반지 3개가 들어있다. CIA 롤렉스가 E&E 물물교환 상자보다 휴대도 간편하고 분실할 확률도 낮았다. 롤렉스는 CIA 공작관이 적지에서 공작원을 모집하거나 협조망을 구축할 때도 유용하게 활용됐다.
고급 시계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특정 브랜드나 모델은 사회적 지위나 성공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단순한 금전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줄 수 있다. 고급 시계는 개인적인 의미나 추억, 취향까지 반영할 수 있어 상대방과 개인적 유대를 강화할 수 있다.
보석이나 돈은 직접적 뇌물거래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시계는 선물로 여겨질 수 있어 뇌물로써의 죄책감을 덜 수 있다. 고급 시계라도 공개적으로 주어지거나 적절한 맥락에서 제공될 경우, 뇌물로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시계는 시간 관리를 도와주는 유용한 물건으로, 실용적인 면에서도 매력적이다. CIA 정보활동에서 롤렉스의 효용성이 높아가면서 러시아 정보기관도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1943년,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요원 일리아 톨스토이 소령과 브룩 돌란 대위가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나 ‘파텍필립 레퍼런스 658’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보통의 파텍필립 시계도 롤렉스가 귀여워지는 가격으로 시계의 끝판왕이라 불리는데, 15개 한정판이었으니 당시 얼마나 고급 시계를 선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략사무국은 티베트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싸울 수 있도록 달라이 라마가 지원해 주기를 원했다. 달라이 라마는 시계 무브먼트의 분해와 조립·수리가 취미였다.
1996년 11월, 비밀스러운 이중생활과 탁월한 첩보 활동으로 ‘배트맨’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CIA 요원 짐 니콜슨이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로 체포됐다. ‘오른손엔 롤렉스 시계를 차고, 왼손엔 잡지와 쇼핑백을 들고 있어라.’ 평소 맞춤 양복과 롤렉스 시계를 즐겨 차는 니콜슨의 고급스러운 취향은 러시아 상부선과의 접선 신호로 확인됐다.
2001년 2월, 20여 년간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로 암약해 오던 FBI 요원 로버트 한센이 체포됐다. ‘FBI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스파이’로 묘사되는 한센의 집에서 러시아로부터 받은 롤렉스 시계 2개가 압수됐다. 그중 한 개는 현재 워싱턴 DC 국제 스파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가짜로 판명됐다. 한센은 시계 수집가였다.
CIA 요원들의 롤렉스 사랑은 비공식적으로 증언되고 있을 뿐 공식 문서로 기록된 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