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세계] 아들 딸도 몰랐던 부모의 정체, 러시아 잠복공작원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 푸틴이 울먹이는 비밀요원의 뺨과 어깨에 입을 맞췄다. 비밀요원의 어린 딸은 엄마를 포옹하고 자기에게 꽃다발을 건넨 사람이 러시아의 대통령이란 사실을 몰랐다.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정보요원들은 적발되더라도 외교관 면책특권으로 주재국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제3국인 또는 상사원·기자·예술인 등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비밀요원은 검거될 경우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거나, 맞교환(swap)될 때까지 교도소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2024년 8월 1일, 러시아에 수감 중이던 서방측 죄수 16명과 미국·독일·폴란드·슬로베니아·노르웨이·벨라루스 등 6개국에 수감된 러시아측 죄수 8명 등 24명이 맞교환됐다. 냉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여기에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비밀요원 둘체프(Artem Dultsev)·둘체바(Anna Dultseva) 부부가 있었다.
2012년, 관광여권으로 둘체프는 우루과이에서, 둘체바는 멕시코에서 각각 아르헨티나로 들어갔다. 남미는 부패 등 후진적 관료 시스템으로 비교적 문서 위조가 쉬워 러시아 정보당국이 신분세탁지로 자주 이용하는 지역이다.
러시아에서부터 부부간이던 둘체프와 둘체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점을 확보한 후, 루드비히 기쉬(Ludwig Gisch)와 마리아 로사 메이어 무노스(Maria Rosa Mayer Munos)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취득했다. 딸 소피아와 아들 다니엘도 낳았다. 2015년에는 콜럼비아인을 증인으로 내세워 결혼증명서까지 만들었다.
2017년, 둘체프 가족은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이사했다. 아르헨티나가 범죄율이 높아 한적한 슬로베니아로 이민 왔다는 구실을 댔다. 둘체프는 IT 회사 DSM & IT를 설립했고, 둘체바는 온라인 갤러리 Art Gallery 5’14를 운영했다. 애들은 연간 학비 1만 달러가 넘는 영국 국제학교에 보냈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슬로베니아는 여권 없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적 감시의 수준도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특히 예술 분야에는 ‘감시나 통제가 없어’ 비밀 활동을 하는 데는 갤러리가 ‘안전한 공간’이었다.
둘체프 부부는 잠복 공작원(Sleeper Agent) 이다. 부부는 10년 동안 꼼꼼하게 위장 구실을 만들어 나갔다. 문제 되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세금은 제때 내고 주차 딱지 한 장 끊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고 언제나 조용했다. 집에서는 스페인어와 영어만 사용했다. 딸과 아들은 아르헨티나 출신 가톨릭 성도로 성장했다. 이웃들은 "그들이 스파이였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이 미디어가 만들어낸 거짓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서 400여 명의 러시아 정보요원들이 추방됐다. 잠복 공작원이 러시아의 귀중한 정보자산으로 부상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잠복 공작원을 지상으로 노출 시킬 수밖에 없었다.
둘체바가 영국에서 두 번의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영국 정보기관은 관람 수요가 전혀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전시회를 여는 외국인을 주목했다. 영국은 슬로베니아에 통보했고, 슬로베니아는 2022년 12월 러시아와 암호통신 중인 둘체바 부부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둘체바의 온라인 갤러리는 러시아의 비밀공작 거점으로 확인됐다.
2024년 8월 1일, 영웅으로 귀환하는 둘체바 부부를 향해 러시아 정부는 ‘비밀요원이 되는 것은 자기희생과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추켜세웠지만, 11살 소피아 9살 다니엘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다. 부모를 존경할지 원망할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