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세계] 모스크바 원칙과 베이징 원칙

2024-07-11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범죄학 박사
장석광

냉전 시절, KGB는 대사관과 언론사에 근무하는 모든 외국인을 감시했다. 도청은 기본이고, 모스크바 요소요소에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했다. CIA 요원에게 모스크바는 험지 중의 험지, 가장 위험한 근무지였다. CIA 정보활동이 KGB에 탐지될 경우, CIA 협력자는 바로 ‘죽음’이었다.

CIA 요원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비전의 원칙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글로 남기지 않았지만, 모스크바로 오는 CIA 요원이라면 누구나 이 원칙을 알았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원칙, ‘모스크바 원칙’(The Moscow Rules)이었다.

원칙 1. 아무것도 가정하지 마라(Assume nothing).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절대 속단하지 마라.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원칙 2. 직감을 거스르지 마라((Never go against your gut). 직감은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노련한 정보요원이라면 자신의 직감을 믿어라.

원칙 3. 적은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Everyone is potentially under opposition control). 영원한 내 편은 없다. 누구도 믿지 마라. 정보요원은 최악을 가정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원칙 4. 뒤를 돌아보지 마라. 누군가는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Don‘t look back; you are never completely alone).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보편적인 행동에서 벗어난 당신의 움직임은 적의 의심을 사기 십상이다.

원칙 5. 흐름에 맞추고 절대 튀지 마라(Go with the flow, blend in). 정장을 입고 해변에 가거나 비키니를 입고 회의실에 가선 안 된다. 정보요원은 회색 인간(Gray man)이어야 한다.

원칙 6. 행동 패턴을 다양하게 하고 위장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라(Vary your pattern and stay within your cover). 출퇴근 시간·이동 경로·식당·카페·은행 등을 고정해선 안 되며, 위장 신분에 걸맞은 전문성을 확보하라.

원칙 7. 그들을 안심시켜 자만에 빠지게 만들어라(Lull them into a sense of complacency). 당신이 자기들의 통제 안에 있다는 확신을 주도록 해라. 자만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원칙 8. 적을 자극하지 마라(Don’t harass the opposition). 의도적으로 체포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적을 자극하는 것은 절대 금물.

원칙 9. 시간과 장소는 당신이 선택하라(Pick the time and place for action).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는 비상시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원칙 10. 옵션을 항상 열어두라(Keep your options open). ‘플랜 B’는 항상 준비해야 한다. 선택의 여지를 두라는 것은 특정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다.

지난 6월 말, 국정원이 중국 공안기관의 불심검문 가능성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중국 당국이 자국에 체류 중인 우리 국민에 대해 국가 안전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채팅 기록·이메일 수발신 내역·사진·로그인 기록 등 우리 국민의 개인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집하고, 불이익처분을 내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2023년 8월 현재, 중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안면인식 기술을 기반으로 한 CCTV가 7억 대 이상 설치되어 있다. 2014년 반간첩법(反間諜法) 시행 이후 17명의 일본인이 중국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지구상 어디에선가 ‘베이징 원칙’(The Beijing Rules)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