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廣場] 현대음악 콘서트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는 지휘자 최수열이 예술의전당과 함께 기획한 현대음악 콘서트 시리즈다. 올해가 두 번째 시즌인데, 7월 4일 밤 9시의 메인 레퍼토리는 음악계의 노벨상인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한 진은숙의 음악이었다.
공연장은 좁디좁은 국내 현대 음악의 저변을 반영한 듯,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작은 리사이틀 홀에서 열렸다. 현대음악을 실연으로 듣기 위해 직접 표를 예매하고 또 공연장까지 오는 음악애호가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작은 홀도 채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기우였다. 리사이틀홀 로비는 유명 음악평론가와 작곡가 그리고 한 두 다리 건너면 다 알 만한 음악애호가들로 금세 가득 찼다. 공연 전 열기와 설렘은 나란히 있는 다른 큰 홀들 못지않았다.
현대음악은 신비함과 당혹감을 준다. 일종의 충격인데, 사전 정보 없이 고막에 꽂히는 충격은 결코 즐길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외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작곡가가 공들여 의도한 충격을 관객의 뇌리로 온전히 전달하는 일은 해석과 기획 단계에서 말끔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대음악 지휘자와 공연기획자가 해야 하는 일이자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평론가가 쓴 프로그램 해설이다. 하지만 음악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작곡가의 의도가 휘발되기 십상이고, 음악가가 아닌 평론가의 글이 자칫 음악보다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다면 작곡가가 직접 하면 되지 않을까? 작곡가는 작가가 아니다. 글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음악으로 만들 필요가 없고, 울림의 창조물에 군더더기 해설을 붙이는 창작자는 없다. 결론적으로 현대음악의 이해 과정, 즉 작곡가의 복잡한 뇌리에서 관객의 텅 빈 뇌리로 음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지휘자와 기획자다.
이 원리를 간파한 이가 현대음악 콘서트의 기획자이자 지휘자인 최수열이다. 그는 종이 위가 아닌 무대 위에서, 글이 아닌 말로 작곡가와 관객의 뇌리를 완벽하게 연결했다.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연주회인 만큼 기획자이자 지휘자 최수열의 책임감은 대단했다.
공연 첫 곡인 헬무트 라헨만의 ‘구에로’(Guero) 연주 전, 명민한 해설가로 변신한 최수열은 무대를 휘저으며 곧 벌어질 사건들을 예고했다. 무대에 악보를 영상으로 띄우고 난해한 곡을 재미있게 설명했는데, 관객과의 소통은 물론 언변까지 탁월해 연극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퍼즐과 게임 모음곡’(앙상블 버전)에서는 놀랍도록 깔끔한 해석을 들려줬다. 이 곡은 생경한 화성과 기괴한 박자 그리고 수많은 타악기가 토해내는 음향 때문에 자칫 음색은 범벅이 되고 혼란만 범람할 수 있다. 게다가 소프라노가 고추장 양념처럼 음들을 버무리니 음악은 비빔밥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휘자 최수열이 차린 명징한 ‘앨리스’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나오는 정갈하고 귀한 코스 요리였다. 여기에 작가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이자, 작곡가 진은숙의 소프라노인 황수미의 열연까지 곁들여지니, 그야말로 음 본연의 맛을 세련되게 만끽한 정찬이었다.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의 음악은 여러 연극의 한 장면씩을 발췌한 부조리극이었다. 지휘자 최수열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이라는 제목처럼 제멋대로 망가지기 쉬운 음들의 휘청임을 노련한 연출가처럼 다잡았다.
특히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연극 ‘대머리 여가수’를 연상케 하는 제2곡 ‘대머리 여가수의 비가’와 몰리에르의 희곡 ‘상상병 환자’가 떠오르는 제6곡 ‘돌팔이 의사의 땋은 머리를 추격하기’가 인상적이었다.
연주회가 끝난 후, 지하철로 가는 길 위에서 작곡과 학생들의 열띤 토론을 엿들었다. 영양가 높은 연주를 자양분으로 섭취한 그들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아침 9시’였다.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가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자주, 그리고 조금 더 오래 지속된다면 대한민국 음악의 미래는 그만큼 더 밝아질 것이다.
예술의전당 가장 큰 홀에서 명민한 지휘자 최수열의 지휘로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전곡을 들을 수 있는 날을 진심으로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