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廣場] 국내 오페라 지평 넓힌 ‘한여름 밤의 꿈’

2024-04-24     여진 연극평론가·콘서트기획가
여진

국립오페라단은 1962년에 창단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오페라단이다. 2000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이후 매해 더 넓고 깊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 오페라 감상의 저변이 커지면서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을 원하는 마니아층도 부쩍 늘어났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희귀한 레퍼토리를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무대에 올리는 일은 큰 모험이다. 국내 오페라 발전을 위해 누군가는 디뎌야 할 첫 걸음을 맏형인 국립오페라단이 과감하게 시도했다. 바로 올해 시도하는 ‘국내 초연 3부작’이다. 지난 2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로시니의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은 국내 초연작이지만 발랄한 내용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간판인 작곡가 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4월 11일부터 나흘간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 올릴 현대작곡가 브리튼의 난해한 오페라 ‘한여름 밤의 꿈’은 모험 중의 모험이었다.

벤저민 브리튼(1913~1976)은 연극과 미술에 비해 음악이 약한 영국이 전면에 내세우는 현대음악 작곡가다. 브리튼은 열 편 넘는 오페라를 썼지만, 독일권의 모차르트와 바그너, 이탈리아의 로시니와 베르디,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 등 쟁쟁한 작품들에 견줄 작품은 없다. 그나마 1960년에 작곡한 셰익스피어 원작 ‘한여름 밤의 꿈’ 정도가 클래식 음악 마니아 및 연극 애호가에게 알려진 정도다. 한마디로 ‘비인기 작곡가의 덜 알려진 오페라’다. 이런 몰이해는 귀에 꽂히는 달콤한 멜로디가 없는 현대음악에 카운터테너(가성으로 여성의 높은 성부를 부르는 남자가수)가 주인공인 파격적 형식이 그 원인일 것이다.

국립오페라단이 선택한 이 어려운 모험의 결과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냉철하게 대성공까지는 아니지만, 보수적으로 잡아도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다.

평일 첫 공연이었지만, 오페라 하우스 로비는 북적였다. 여유있게 극장 로비에 도착한 관객들은 100페이지가 넘는 프로그램 북을 숙독하고 있었고,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곡을 들고 온 관객도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 1층은 거의 만석이었는데, 국내 오페라 시장의 두터워진 층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공연은 정말 훌륭했다. 국내 초연이다 보니 연출(볼프강 네겔레), 지휘(펠릭스 크리거), 무대(스테판 메이어), 의상(아네테 브라운), 안무(소머 얼릭슨), 주연(오베론 역, 제임스 랭) 등 주요 제작진과 주역은 모두 베테랑 외국인이었다. 이들의 오랜 경험과 감각이 다른 출연진과 오케스트라(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큰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연극적 요소가 많은 오페라이다 보니 음악의 흐름과 셰익스피어 원작의 흐름 사이 이음새가 중요한 작품이다. 이 이음새가 너무 뚜렷하면 공연 전체가 토막토막 나고, 너무 밋밋하면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볼프강 네겔레 연출은 이 마디의 연결을 가수가 아닌 연극배우 퍽(Puck, 셰익스피어 원작의 장난꾸러기 요정)을 활용해 멋지게 해결했다.

공연에서 요정 퍽은 상황에 따라 주역 한 명(배우 김동완)이 맡기도 하고, 무대 전환이나 극적 효과가 필요할 때는 분신술처럼 세 명(무용수: 조정흠, 공지수)로 분리되어 마술적 효과를 낸다. 주역인 퍽들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문제작 ‘시계태엽 오렌지’의 악동 의상을 입었는데, 이는 매우 흥미롭고 또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기가 막힌 연출이었다. 여기에 3막 극중극 연출은 내내 낯설었던 현대음악을 잠시 누르고, 원작의 대사와 사건으로 관객을 몰고 가 폭소를 터뜨려냈다. 요정의 왕 오베론 역의 카운터테너 제임스 랭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지쳐갔지만, 다른 국내 가수들과 합창단의 오밀조밀한 앙상블이 멋지게 덮어주었다. 특히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이 오베론만큼 빛나는 성량과 연기를 뽐냈다.

국내 오페라 지평을 넓히려는 총대를 기꺼이 멘 ‘맏형’ 국립오페라단의 두 번째 모험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모두에게 박수받아 마땅한 대업이었다. 이 기운이 5월 23일에 선보일 에리히 코른골트의 문제작 ‘죽음의 도시’까지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