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 싶은대로...울고 싶은대로...이게 노래의 힘입니다
[최영훈이 만난 사람] '우리의 소리' 하는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 늙어서 호흡이 짧으면 짧은대로 노래할 것 목에 혹 생겼을때 극단적 생각까지 하기도 대중음악을 듣고 신나게 울어젖히면 개운 실패해도 경험으로 여기면 이 세상은 내 것 국악과 클래식을 엮는 식으로 노래 만들어
그는 가수다. 가수인데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소리꾼이라 한다. 그래서 그의 공연은 콘서트가 아니다. 팬과 함께 하는 큰 소리판이다. 가수에게 ‘우리의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 시대의 소리꾼, 바로 장사익이다.
사익 형이 오랜만에 방송을 탄다. 그것도 한 두곡만 하는 게 아니다. 26일 6시부터 KBS2의 ‘불후의 명곡’에 나와 10곡이나 부른다. 겨우내, 2년 넘게 코로나에 지친 분들을 위해 봄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다고 한다. 찔레꽃부터 부른다. 직접 노랫말을 쓰고 작곡한 슬픈 노래다. 절절하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라 노래한다.
그는 전생에 음유시인이었을 거다. 노래로 밥을 얻어 먹고 천하를 주유했으리라. 즐겨 부르는 ‘봄날은 간다’는 최백호와 듀엣으로 열창했다. 객석은, 같은 듯 다른 두 음색의 어울림에 감동의 도가니였다. 우리 모두 본방사수해 이 ‘민족의 소리꾼’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장사익만큼 나는 이어령 선생을 좋아한다. 10살 터울의 둘은 ‘충청도 핫바지’로 이어령은 온양, 사익은 갯가 광천 태생이다. 스타가 되기 전부터 이어령의 크고 작은 강연이나 행사에 동행했다. ‘노래 좀 허는...’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한 거다. 2019년 말 서울 통인동 ‘이상(1910~1937)의 집’에서 문화지킴이들에게 특강을 했다. 그때 사익은 시인 천상병의 ‘귀천’을 노래했다. 이어령은 입을 손으로 감싼채 노래에 몰입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이 얼마 전 그에게 액자를 건넸다. 가로 세로 1m가 넘는 큰 액자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쓴 헌시(헌시)가 적혀 있었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이라는 긴 제목 시를 붓글씨로 썼다. 치솟아 공중을 떠돌다 폭포처럼 내리꽂히는 그의 소리가 글씨에 묻어났다. 이어령은 액자를 거실의 눈에 띄는 자리에 세워뒀다.
사익 형과의 인연은 한 20년 됐다. 첫 만남 때 세검정 집에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갔다. 살갑게 맞아 준 형에게 나는 금방 매료됐다. 고추장 돼지불고기를 저녁상에 내와 반주를 곁들여 먹었다. 2001년 나는 미국 연수를 떠났다. 돌아올 무렵 30박 31일 간 미국 캐나다 대륙을 일주했다. 오토캠핑의 진수를 만끽하던 중반 쯤 뉴욕 한인거리 S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김치찌개를 먹고 거리 구경을 하다 한인 레코드점을 발견했다. 사익 형의 노래를 담은 CD를 20달러 내고 샀다. 미국 중부의 광활한 평원을 지날 때 그 CD를 틀었다. 첫 곡이 동백아가씨였다. 이미자의 그것과는 또다른 발성, 치솟았다 내리꽂히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고 감상하던 내 눈에 노스탤지어(鄕愁)의 이슬 방울이 맺혀 흘렀다.
그는 60년대 말 유행가를 한 3년 배우고 나이 들어선 국악도 배우고 클래식도 듣고 했다. "그 모든 게 다 쌓인 것이겠죠. 김대환 선생님께 들은 한 마디가 내 노래를 변화시켰어요. ‘너 박자 맞추지 말고 노래해봐’ 그러시더라고. 산토끼를 불러보라고 시켰는데 또 그래요. ‘너 속으로 박 자 세고 있잖아.’ 그때부터 박자를 무시하고 노래를 했죠. ‘찔레꽃’도 박자가 없잖아요. 호흡대로 가는 거예요."
콩나물 대가리가 강요하는 박자따위는 저 멀리, ‘박자는 먼곳에’로 보냈다. 소리꾼 장사익, 그에게 자연스러움을 가르친 영원한 스승은 재즈 음악가 고 흑우 김대환이다. 쌀 한톨에 반야심경 제목까지 283 자를 새겨넣은 극미세조각에 심취했다. 애마 ‘할리 데이비슨(오토바이)’ 타고 산천을 훑고다녔다. 매년 삼일절,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한국-일본 재즈음악가들과 국악인, 춤꾼들이 모였다. 13회나 진행했던 이 추모공연도 코로나로 2020년부터 3년째 불발이다. 일본 재즈꾼들은 올해도 추모공연을 할 거라고 한다.
사익 형은 40~50년 전부터 ‘님은 먼곳에’, ‘봄비’, ‘대전 블루스’ 같은 옛날 노래도 자주 불렀다. 자신의 숨 길이에 장사익 표 운율에 맞춰 부른다. 리바이벌도 똑같으면 모양이 빠진다. "그러면 이미테이션(Imitation) 가수가 된단 말이죠. 카피(Copy)해봐야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오리지널(Original-원곡)이 있지만 새로움을 부여해야 새롭게 태어나는 거라고 사익은 말한다.
우리 악기와 서양 악기를 함께 사용하는데 동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했다. "해금과 바이올린이, 아쟁과 색스폰이 함께 무대에 등장해도 잘 어우러집니다." 사익은 "그것도 배려예요.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적인 배려"라고 해석했다. 보통 가수들 보면 사운드가 똑같은데, 사익의 음악에는 주인공이 계속 달라진다. 트럼펫이 주인이고 기타가 주인이고 해금이 주인이고 이렇게 변화를 주면서 노래를 엮는다.
토속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게 모여 음악으로 재구성된다. 잘 익혀 어울리게 하면 새 생명력으로 외국 사람들도 좋아한다. "악기 하는 친구들이 뒤에서 두두둑 소리북을 치든지 추임새를 넣어요. 같이 만드는 음악인 거예요. 공연할 때 스모그(Smog-드라이 아이스 연기)같은 거 일절 안 피워요. 연기 피우면 멋있죠. 하지만 맑고 깨끗한 그대로가 좋아요."
형은 몇년 전 목에 혹이 생겨 8개월 간 노래를 쉬었다. 건강을 되찾고 내공을 키우려고 태극권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쉬는 동안 ‘소름 끼치는 노래’를 들었단다. "멕시코 여가수가 90살 넘어 부른 노랜데, 아!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예요. 노래를 압축해 불렀어요. 힘이 있으니까 테크닉, 파워로 부르잖아요. 나이 먹을 수록 힘이 달릴 거란 말이죠. 늙으면 늙은이답게 해야 해요. 호흡이 짧으면 짧은 대로, 음이 안 올라가면 안 올라가는 대로."
꿈 꾸듯한 천진한 얼굴에 주름이 꿈틀거린다. "아흔 살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 지팡이 짚고 읊조리면서 노래한다 쳐봐요.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진짜 노래, 진짜 소리란 말이죠. 그런 노랠 계속 할 거예요. 그러려면 빠지는 힘과 반비례해서 공력을 더 길러야죠. 무용가 조갑녀 선생님이 인생 춤을 선물했어요. 휠체어 타고 와 손 하나 탁 올리고 발 한 번 척 움직이고 앉은 거예요. 기가 막혔어요. 딱 1분으로 ‘지구가 무너지는 춤’을 추신 거죠. 그런 노래를 하려고 해요. 나이 먹는 게 얼마나 재미지는지 ...(웃음)"
형이 20년 가깝게 살고 있는 세검정 집, 봄이면 건너 석파정 위 벼랑에 진달래가 만발한다. 눈이 내릴 때 그곳의 큰 바위가 와불로 변한다. 여기가 눈, 저기가 귀라고 설명하는 형의 얼굴이 진지하다. 비가 올 때 그 집의 큰 통 유리창으로 보이는 경치는 참 절경이다. 숨겨 둔 독주를 꺼내와 한 잔 따라주는 걸 마시면서 봄 밤에 꽃구경 한 일이 생각난다. "시내는 다 회색이잖아유. 하늘이 파랗고 노랄 때도 있고, 꽃 피고 단풍도 지고 사시사철 있으니. 사람도 인연이지만 집 또한 인연인 거지유. 마음 편안하게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수 있는 집이 스위트 홈이어유."
마흔여섯에 가수가 됐다. 반올림해 30년 가깝게 가수도, 팬들도 가슴이 설레고 마음을 데워주는 소리를 했다. 노래를 못하고 쉴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단다. "노래를 못 할 수 있다 생각하니 경비도, 운전도 허리가 아파 못 하겠고 막막했지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노래인 거라." 수술 후 공연을 재개했다. 그때 주제가 ‘꽃인 듯 눈물인 듯’이다. ‘노래 부를 때가 꽃이라면, 노래 못 할 때는 눈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노래 못 하면 세상에 없는 게 낫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면서 미소짓는다.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아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성대에도 근육이 있어요. 60년, 70년 굳어져 온 근육을 도려낸 자리는 몰랑몰랑하단 말이죠. 바람을 내도 약간 흔들릴 거고, 동그란 소리를 내려고 해도 약간 굴곡이 지고, 높은 소리에서 자신이 좀 덜 가고..." 그때도 "갈수록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고 회고했다.
"미국 가서 한국말로 하는데 내가 슬프게 부르면 그들도 뭔가 슬프게 느끼고, 빨갛게 부르면 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사람들 느낌은 다 똑같은 거예요. 인생은 꽃일 때도, 눈물일 때도 있어요. 요즘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울지도 않잖아요. 옛날에는 막 곡소리를 내고 울었는데 말이죠. 하찮은 대중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니, 이게 얼마나 멋있는 일이에요? 한번 신나게 울어젖히면 개운해요. 노래, 예술의 힘이죠."
‘언제 가장 힘들었냐?’고 물어보니 "맨날 힘들었다"고 한다. 힘들고 무더운 계절에 성장한다는 형의 말. "어느 분이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가을일 것’이라고. ‘아니어유. 한여름이어유’. 여름에 식물들이 성장해요. 봄에 싹이 나와 꽃 피우면 그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혀 여름에 크는 거죠. 우리는 하루하루 여름처럼 힘들게 살아요. 그렇지만 그 여름은 진행형이란 말이에요. 가을에 진행을 멈추고, 겨울엔 죽는 거죠."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 "맨날 잘려 직장을 10여 군데 옮겨다녔어요. 그때 술, 담배했으면 서울역 ‘숙자 형들’(노숙자)하고 같이 있어야 돼요. ‘내가 부족해서 그래’, ‘못나서 그래’ 하고 오뚝이처럼 일어났어요. 실패해도 경험으로 여기면 공부가 돼요. ‘좋아, 10년 안에 이 회사 접수하겠어.’ 이런 마음으로 해봐요. 그러면 이 세상이 내 것이어유."
형도 쳐죽일 코로나 때문에 힘들었다. 2년 넘게 제대로 공연을 못했으니...얼마 전 전화로 안부를 묻자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봄이 와 따듯해지면 한 번 봐유~!"라고 말했다. 사익 형은 늘 웃는 얼굴이다. 공연 때 무대에 올라서도 웃는다. 너스레를 떨다가도 감정 잡을 때만 심각한 얼굴이다.
"많이 웃어서 주름살이 많이 생긴 거예요. 주름 예쁘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죠. 세상 살아가는 마음가짐에 따라 표정이 나오는 거예요. 애기들 넷이 있는데 사탕을 선물로 주려 한다 생각해보세요. 생글생글 웃는 놈. 인상 쓰고 있는 놈, 누구한테 주겠어요. 그게 복인 것이죠. 주름은 원래 흉한 것인데 나이 들어 ‘저 주름 아름답네’ 이런 소리 들으면 얼마나 좋아요. 저는 방송 나갈 때 언니들이 화장해준다고 덤벼도 도망가지, 절대 안해요. 자연 그대로가 최고예요."
사익의 소리가 사랑받는 이유는 여럿 있다. 가슴 적시는 아름다운 노랫말도 그중 하나다. 그가 부른 30여 곡은 전부 시를 가사로 옮긴 것들이다. 대표곡 ‘찔레꽃’과 ‘하늘 가는 길’, ‘꿈꾸는 세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는 그가 직접 썼다. "나머지는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를 훔친 것(웃음)"이라고 고백한다.
형은 빼어난 우리말로 갈무리한 시들을 읊조리면서 곡을 만든다. ‘아버지’라는 노래는 시이기도 하지만 뮤지컬 한 편과 같기도 하다. 그 노래는 클래식 곡을 빌었고, ‘아니리’라는 판소리의 사설도 슬쩍 집어넣었다. "솔직히 다 카피죠. 그래서 작곡이라 안 하고 엮음이라고 해요. 배웠던 국악, 들었던 클래식을 엮는 식으로 노래를 만들어요."
시를 좋아하는 것도 그의 성정(性情)과 관련이 있다. "원래 진득하니 있지를 못해 소설 같은 거 잘 못 봐요. 그런데 시는 함축성이 있잖아요. 부부 작가인 조정래 소설가와 김초혜 시인을 가끔 만나는데, 조 선생이 ‘이거는 뭐고, 저거는 뭐고’ 5분 동안 얘기해요. 그러면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선생이 ‘이거는 이거 아니야’라고 한마디로 함축시켜버려요.(웃음)"
"시인들은 단어 하나에도 목숨을 건다"고 말할 땐 표정이 엄숙하다. "시에는 아름다운 시어가 있고, 깊고도 넓은 세상과 자연에 대한 체험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문학평론을 공부했을 리 없는데 그의 시론(詩論)은 본질을 꿰뚫는다. 시를 가사로 ‘훔쳐’ 쓰니 그의 노랫말들은 귀에 꽂혀 심장을 얼얼하게 만든다.
"클래식은 몇백년을 즐기잖아요. 뭔가 아름다움이 있고 위안해주고 즐겁게 해주니 질긴 생명력을 갖는 거죠. 유행가, 특히 아이돌 노래는 거의 생명력이 없어요. 가사 보면 뼈가 타는 이 밤이 어쩌고 그러잖아요.(웃음)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저 빨간 감처럼 철이 들 수밖에는.’ 얼마나 단순해요. 이런 것이 기막힌 것이에요. 아이돌 스타들, 애기들 다 얼굴도 예쁘고 춤도 잘 추고 코리아 팝이라는데 가수 이름은 알아도 무슨 노래인지는 몰라요. 본질이 없고 껍데기만 있는 거죠. 시도 노래예요. 아무리 좋은 시라도 덮어놓으면 끝이죠. 시로 만든 음악이 널리 알려지고 불려야죠."
누군가의 시를 ‘훔쳐’ 만든 노래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네...’
교회도 없이 산속에서 공부만 하며 사는 이현주 목사가 시를 썼다. "남한강, 북한강에서 ‘남’ 자 버리고 ‘북’ 자를 버리니까 큰 한강이 되는 거 아니에요. 얼마나 기가 막혀요." 변변치 않은 직장들을 전전하면서 유행가도 국악도 배우고, 클래식도 들으니, 이 모든 게 쌓였다. "나이 마흔여섯에 노래를 하게 된 게 기적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형. 그는 붓으로 나와 김석구 부장, 최영재 국장을 위해 글을 써줬다. 최 국장에게 준 글이 이현주 시인의 시 끝부분이다.
그가 백수(白壽)를 넘어서도 소리꾼으로 남아 계속 노래하길 빈다. 태양빛이 뚝뚝 떨어지는 밝고 맑은 소리, 여름철 들판을 적시는 단비 같은 소리, 들판에 곡식 익는 향내같은 구수한 소릴 하시길...신새벽에 그의 얼굴, 고운 주름이 새겨진 형의 얼굴이 그립구나.